따뜻한 봄바람 불 때쯤 너에게, 너에게 갈게
그는 지난 미니앨범의 마지막 곡 ‘그리움에’에서 팬들과 했던 약속을 지켰다. 진은 정말 따뜻한 봄바람이 불 때 돌아온 것이다. 겨우 반년만의 컴백이다.
첫 곡 ‘Don’t Say You Love Me’는 동서고금을 떠나 현대 대중음악이 꾸준히 건드려온 주제를 취한다. 네가 싫은데 싫어할 수 없는, 보내려는데 보낼 수가 없는 연인 사이 구겨진 심리다. 배우 신세경과 싱가포르에서 찍은 뮤직비디오에선 이 다잡을 수 없는 감정을 3분 10초 내내 묘사한다. 여기서 진은 뽀드득 우윳빛 비트 속에서 상대와의 무너진 관계를 노래하는데, 그의 잘 다듬어진 벨벳 톤은 팔세토로 정점을 찍는 코러스에서 더욱 비범함을 뽐낸다. 이번 앨범을 듣고 해외 매체들이 공통으로 언급하고 있는 진의 보컬리스트로서 성숙함이 느껴지는 지점이다. 어쩌면 이 노래가 별로라고 말할 수 있는 있는 논거란 달디 단 ‘팝의 정석’ 정도가 아닐까. 누가 들어도 긍정할 수밖에 없는 팝 음악에 들씌울 수 있는 건 상업성이라는 공허한 누명밖엔 없는 법이다.
‘Don’t Say You Love Me’는 영국 잡지 클래시(CLASH)가 지적한 대로 자칫 진부한 팝의 공식에 빠질 수도 있는 곡이었지만, 진의 감성을 담은 노랫말은 기어이 그 곡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이는 진이 이번 앨범에 관해 직접 “보편적인 삶의 경험에 대한 제 관점을 제시하며, 일상의 감정을 따뜻하고 진솔하게 담아냈다”라고 설명한 것과도 통하는 부분이다. 클래시는 솔로 데뷔작 ‘Happy’가 팬들에게 주는 선물이었다면, 이번 앨범 ‘Echo’는 진이 내러티브를 내면으로 돌려 스스로를 돌아보는 느낌을 준다고 썼다.
또 다른 세계에서라면 진은 BTS의 멤버가 아닌, 기타와 드럼이 보컬을 받쳐주는 팝록 밴드의 프런트맨이 됐을 것이다
NME의 말에 동감한다. 지난 앨범으로 로큰롤 안에서 행복했던(Happy) 진의 장르적 메아리(Echo)는 이번 앨범에서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쿵쿵거리는 베이스 드럼으로 설렘의 밀도를 높이는 콜드플레이 풍 바로크 팝 스타일(‘Nothing Without Your Love’)을 경험해 보라. 이 곡이 작품을 관통할 때 우린 과거 콜드플레이가 함께 한 진의 노래(‘The Astronaut’)가 단순한 비즈니스 차원의 협업이 아닌, 예술가로서 연대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별과 고백에 이은 세 번째 곡 ‘Loser’는 시소(seesaw) 같은 메인 기타 리프가 예고하듯, 티격태격하는 커플의 모습을 다룬다. 지난 미니 앨범을 휘감았던 밝고 상쾌한 느낌과는 살짝 거리를 둔, 이번 앨범의 가장 본격적인 록 사운드다. 일본 싱글 ‘DNA’와 걸그룹 아이들의 우기가 피처링 한 ‘Hate Rodrigo’ 뮤직비디오 이미지를 더한 듯한 YENA(최예나)의 피처링은 거의 신의 한 수급으로, 이 곡에 팝 펑크라는 장르명을 붙일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YENA의 존재감 때문이라 해도 무방하다.
진이 추구하는 록의 기운은 ‘Rope It’에까지 번진다. 하모니카와 휘파람, 말울음소리와 기타의 치킨 피킹(chicken picking)이 조목조목 풀어놓듯, 미국 대중음악의 큰 물줄기 중 하나인 컨트리를 품고 가는 트랙이다. 나는 여기서 미국 대중과 더 깊이 소통하겠다는 진의 의지를 느꼈다. 다음 곡 ‘구름과 떠나는 여행’은 케이팝이라는 용어만큼이나 포괄적인 제이 록(J-rock)이라는 전제를 붙이고 있는데, 이 노래엔 굳이 그런 이름표를 달지 않아도 될 법하다. 구겼다 폈다 입체적인 템포를 지나 일렉트릭 기타 솔로가 박명처럼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음악에서 장르 찾기란 그저 덧없는 구분일 뿐이다.
밴드 음악 또는 록 음악의 유행이 돌아올 것이란 말에 코웃음을 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유행이란 게 딴 거 없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즐기며 행하면 유행은 작동하는 것이다. 음악의 경우, 특정 장르에 다수가 관심을 가지기 위해선 다수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그 장르를 자주 시도하고 들려주면 된다. 언젠가 서태지와 신해철 같은 아이돌급 스타들 덕분에 한국의 록/헤비메탈 마니아들은 한때나마 천국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로부터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나는 진이 그 역할을 맡아준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다. 앨범 두 장의 음악 행보를 보면 그의 록 음악에 대한 관심은 단발성이 아닌 것 같아서다.
이렇게 말하면 또 ‘진의 음악이 무슨 록이냐’는 철 지난 골품제 논쟁이 들끓을지 모르겠다. 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록의 부활을 막으려드는 저 모순적이고 소모적인 반문은 일단 제쳐두자. 나는 편향이 심각한 가요 시장의 장르 다양화에 진의 음악 취향이 의미 있는 파장을 일으켜주길 바란다. 앨범 제목(Echo)에 어울릴 사운드 프로덕션이 돋보이는 ‘Background’를 너머 6개월 전 ‘I’ll Be There’의 청량감을 이어받은 마지막 곡 ‘오늘의 나에게’에서 나는 그 희망을 어렴풋이 보았다. 코웃음 칠 일이 아니다. 진의 추진력과 영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