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스를 플러스로

#에세이 #심리 #인생

by 전종목

30대 후반의 생일 즈음, 스스로와의 싸움으로 몸부림치던 하루였다.

갑갑할 때면 늘 찾는 집 앞 공원으로 향했다.

독립문 공원은 시끌벅적하게 뛰노는 아이들의 너른 공터도, 생각을 하며 쉬어 갈 만한 작은 벤치도 찾을 수 있는 제법 근사한 공원이다.


이 동네로 이사한 지가 벌써 6년이 되었다. 효준이의 병을 알고 나서 부랴부랴 건너올 때만 해도 공원의 근사함은 잘 보지 못했다. 그저 병원 가까운 곳에 있는 깨끗한 집만 찾아왔더랬다. 살다 보니 병원이 가까워서 얻는 안정감보다 근린시설이 주는 만족감이 더 클 정도로 좋은 곳이다.


잠시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본다. 하늘을 보는 습관을 일부러 들이고 있다. 우울하고 힘이 들면 갑갑한 모니터나 스마트폰 액정이 평소보다 더 지긋지긋해서인지 탁 트인 하늘에 위로를 받는다.

얼마나 하늘을 보고 있었을까? 웬 노인 하나가 옆자리에 앉아서 나를 보고 미소 짓고 있었다.


근사한 수염을 기른, 일흔은 훌쩍 넘어 보이는 그를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왜 마스크를 안 했지. 에휴’였다. 어딘가 친숙한 얼굴이었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그의 외모나 인상보다 마스크가 더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처럼 마스크를 잘 쓰고 있어야지.’

하는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내 마스크! 어디 갔지?


코로나 터진 뒤 처음이다. 마스크를 빼먹고 나오다니.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방금 전까지, 그러니까 하늘을 보고 있을 때도 나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어디에 흘린 걸까? 미간을 찌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마스크는 보이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전화기도? 지갑도? 그 순간 나는 지금 이 순간이 일반적이지 않은, 그러니까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주 기묘한 느낌.


“완전히 잃어버린 게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네.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걸세.”


어릴 적부터 추리소설과 만화들을 두루 섭렵한 나이기에, “잃어버렸다는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아셨죠?” 하며 내 물건을 가져가 놓고 괜히 말 돌리는 의심스러운 노인으로 치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노인의 뜬금없는 위로? 격려? 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기묘한 상황에 말을 거는 저 인물 역시 현실이 아닐 테니.


더 이상한 것은 빙글빙글 웃는 얼굴의 친숙함이 어디서 본 정도를 넘어 거의 가족, 그러니까 내 아버지와 아주 닮아 보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지은 적 없는 장난기 넘치는 표정이라 더 이상한 기분이었다.


“누구… 시죠?”
어렵사리 건넨 내 말을 무시하듯 노인은 뭐가 그리 신나고 즐거운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아이쿠, 미안하네. 정신이 없었네. 내가 누군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네. 아닌가? 중요한가? 하지만 뭐,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그 이야기부터 나누세.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하나…”


혼자 들떠 있는 노인을 보면서 어이가 없었다.

‘내가 요새 피곤하긴 했구나… 그래. 요새 잠을 통 못 자서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보다. 잠든 것도 몰랐네. 이게 자각몽이란 건가? 기왕이면 보고 싶은 사람들이나 나오지. 이상한 할아버지가 나오고 그러냐…’


“이상한 할아버지라니! 다른 사람은 다 그렇게 생각해도 네가 그러면 안 되지. 껄껄껄!”


생각을 읽힌다는 것이 유쾌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적잖이 당황스럽고 민망했다. 가상의 인물한테도 이런 기분이 들 수 있구나 싶었다.


“그래. 내가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혼자 들뜬 것 같아 미안하네.

자네가 놀랄 법도 하지. 지금이 현실인지 아닌지, 내가 누구인지, 이런 것들은 혼자 차차 알게 될 걸세.

그보다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자고. 나도 어렵게 이 자리에 찾아온 거니까 말이지.”


“찾아왔다고요? 저를? “


‘희한한 설정이네. 뭔 이런 개꿈도 이상하게 꾸는지.’


어차피 현실도 아닌데 예의를 지켜 무엇하겠나 싶지만 그래도 신나서 나를 찾아왔다는데 너무 막 대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자리를 고쳐 앉고 물었다.


“흠… 저를 왜 찾아오신 거죠?”


“자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어서 왔지. 자네 생일선물로. “


“저를 잘 모르시나 본데… 저는 누가 해 주는 조언 별로 안 좋아해요. 먹지도 못할 거. 걍 기프티콘이나 주세요.”


내 허튼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은 말을 이었다.


“나만큼 자네를 잘 아는 사람은 없지. 자네는 조언을 싫어하지만 가벼이 듣지는 않지. 겉으로는 반발하고 틱틱거려도, 누구보다 진심으로 듣고 깊이 받아들이려고 애쓰지. 그렇지 않나?”


“오… 그럴듯하시네요. 저도 이런 말 잘하는데… 누가 들어도 자기 이야기처럼 잘 말해요. 바넘 이펙트~약 잘 파는 스타일이라는 이야기 자주 듣지 않으셨어요?”


“소싯적에 자주 들었지. 그나저나 요새 많이 힘든 것 같던데… 괜찮은가?”


‘아… 약간 그런 거구나. 신. 신이 내게 말을 해주는 그런 설정인가. 에이 모르겠다. 꿈 설정이 뭐 그리 중요한 거라고. 그래. 기분도 갑갑했는데 꿈속의 신에게라도 털어놓자’


의심을 지우고 나니 마음이 편안했다. 아마 내 마음이 편해진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를 보며 미소 짓는 그 얼굴이, 눈빛이 너무도 친숙했다. 정말 오래 안 사람처럼, 그 덕에 마음이 놓였다. 그래선지 속에 잇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게요. 참 쉽지 않네요. 삶이 주는 고난을 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도 끝이 없어요. 아이는 늘 걱정스럽고, 아내는 자주 아파요. 제 일도 걱정이고요. 어렵다고 해서 도와준 사람들도 속 썩이고. 제 삶은 언제쯤 편안해질까요? 그런 날이 올까요?”


“잘 알지, 그 마음. 어릴 땐 세상 원망도 많이 했겠지만, 어디 보자… 지금 쯤이면 스스로에 대한 원망만 하고 있을 즈음이겠구먼. 고생 참 많네 자네.”


나를 빤히 보며,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이런 말을 건네는 그 노인의 말이, 평소 같았으면 화가 났을 말인데도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정말 나를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저, 어떻게 살면 좋죠? 일도 잘 모르겠고, 요샌 많이 허무하고 그래요. 사람들에게 에너지 쏟고 살았더니 소진된 것도 같고…”


“그래서 내가 온 걸세! 하하하!... 좀 멋쩍구먼. 어쨌든 걱정 말게나. 자네가 가진 최고의 강점으로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테니. 그걸 알려주려고 내가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고. “


“제가 가진 강점요? 뭐지… 나 뭘 잘하더라? 아이디어 내고, 드립 잘 치고, 게임 잘하고, 잘 만들고, 노래 좋아하고 쫌 부르고… 이야기 잘 들은 후 정리해 주고…”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음… 요리도 은근 잘하고…아 뭐지…?”


“자네가 잘하는 건 재해석하는 것이잖나. 단순한 상황에서도 많은 의미를 찾아내고, 연결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게 최대의 강점일세. 물론 게임도 잘하고 드립도 잘 치긴 하지만 말이지 “


“재해석하는 능력… 그렇죠. 그런 걸 잘해서 이것저것 잘 만드는 거였죠. 스피치 코치도 그걸로 잘했던 거고. 아이디어를 내는 것도 정말 새로운 걸 만드는 게 아니라, 해석을 잘 해내서 연결하는 거였으니. 맞아요!... 근데 그걸로 뭘 하라고요?”


노인은 개구쟁이처럼 씩 웃었다.


“재해석하게. 지금의 상황을. 그리고 정리해보게.”


“정리하라는 건… 제 과거와 지금 상황을 재해석해 보라는 거죠? 강연 만드는 것처럼?”


이제야 감이 왔다. 힘든 상황에 있을 때, 나는 그 고난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애썼고, 그 힘으로 지금껏 살아왔다. 그걸 이야기해 주고 싶은 거였구나.


“그렇지. 하지만 진짜 적어보고 정리해 봐야 하는 건 따로 있지. 이걸 말해주고 싶어서 왔다네.”


“따로 있다고요? 그게 뭐죠?”


“지금부터 미래까지도 적어보게. 자네를 힘들게 하고 걱정하는 것들, 아니면 바라는 것들 모두를 말이지. 마치 그 모든 것들이 과거가 된 것처럼.”


“그 모든 것들이 과거가 된 것처럼…?”


“그래. 자네가 내 나이가 되어 삶을 돌아보며 정리하는 것처럼 말이지.”


그 말을 하고 또 개구쟁이처럼 씨익 웃음 짓는 저 얼굴… 그래… 이제 알겠다…

이 노인이 누구인지도, 뭘 하라는 건 지도.


“… 저는 잘 살았나요?”


“물론이지. 내 얼굴을 보면 모르겠나? “


“자세히 좀 말해 주세요. 아내는 잘 있나요? 아프진 않고요? “


“우리 나이가 되면 안 아프던 곳도 다 아프지. 이래 보여도 내가 100살이 넘었어.

의학이 좋아져도 늙으면 서러운 건 비슷비슷해.

다행히 마누라는 나보다 건강하지.

30대 중반에 한창 아프고 힘들어하더니, 그게 계기가 됐는지 그 뒤로 운동도 열심히 하고 건강 관리 잘해서 함께 골프도 치고 잘 지내고 있지. 아마 오늘도 골프 치러 갔을 걸?


“효준이, 효준이는 잘 컸나요?”


“아주 튼튼하게 잘 컸지. 스무 살이 되기 전이었던 것 같은데, 유전자 치료가 개발됐지.

그래서 지금은 지 아내와 아이도 낳고 잘 살고 있어.

그 녀석, 얼마나 든든하게 컸는지 몰라. 어쨌든 우리보다 훌륭한 친구니까. 자네도 잘 알지?”


“그렇죠. 저보다 훨씬 훌륭한 녀석이라 잘 클 줄 알았어요.

아버지와 새어머니 일은 잘 정리했나요? “


“아 지금이 그즈음인가? 그건 아주 금방 해결이 됐지.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선택, 참 잘한 것 같네.

마음이 아주 어려웠던 걸로 기억이 나는데, 지나고 나니 그냥 잘했다는 생각만 남더군.

아버지께서 고마워하고 기뻐하셨지. 어쨌든 아들이 손주를 데리고 다시 집으로 와서 잘 지내 주었으니.


나도 손주를 보고 나니,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해서 용서와 화해를 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후회스러웠을까 생각이 들었다네. 그랬다면 아버지를 보내 드리면서 아주 깊이 후회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그 해, 참 고통스러웠던 한 해였지만 그 덕에 참 잘 됐지.”


“그 덕에 잘 됐다고요?”


“그래. 그때 코로나로 일도 많이 줄고, 오래 묵혔던 일도 가슴 아프게 올라오고, 사람들 때문에 속도 많이 상하던 때였지만, 그 덕에 아주 좋은 삶을 살았어.”


“왜죠? 저는 지금 진짜 힘든데…”


“우리가 즐겨 쓰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인간의 가장 훌륭한 능력은 마이너스를…”


“… 플러스로 바꾸는 능력…!”


“부정적인 상황에서 긍정을 발견하는 게 재해석의 힘이지.

우리는, 정확히는 전종목이라는 사람은 그걸 참 잘하지. 그 이후 원하는 것들을 많이 얻었지.


새로운 시도의 결실도 얻고, 동료들과 즐거운 일들도 많이 이루고.

좋은 일만 있을 순 없듯 중간에 힘든 일도 많이 있었지만, 돌아보면 꽤나 좋은 인생이었어.

그러니 걱정 말게. 나를 믿게나.


완전히 잃어버린 게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네. 반드시 찾을 수 있을 걸세.”





스스로에 대한 의심, 회의감, 여러 걱정들로 힘들게 지냈던 요즈음입니다. 생일이라는 것이 뭐 그리 의미가 있나 싶다가도, 나라는 존재가 태어난 것만으로도 축하를 받은 날이니 저 개인에게 이보다 더 의미 있는 날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코로나 덕분에 삶을 엄청나게 생각하고 돌아보게 됩니다. 비단 일이 줄고,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는 것만 문제가 아니라, 여러 가지 쌓아온 일들의 방아쇠가 되어, 마치 둑이 터져 물살에 휘말린 기분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겪어야 하는 일들이 온 거죠. 한 순간에 와서 더 힘든 거고.


여러 가지 변화를 계획 중입니다. 얼마나 해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애써 보려고요. 돌아볼 때 꽤 근사한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제가 살고 싶은 삶을 살 겁니다.


인간관계가 많이 좁아진 느낌을 받습니다. 코로나와 무관하게,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살다 보니 자연스레 동료들과 몇몇 지인들을 제외하고는 교류조차 거의 하지 않고 살아서 그렇습니다. 좀 사람 만나고 살아야지 생각도 들고, 나 참 사람 좋아하는데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페북도, 브런치도 소중합니다. 글은 계속 쓸 생각이고, 영상도 찍고, 스트리밍도 해 볼 생각입니다. 봉사도 적극적으로 찾아서 하려고요. 예전엔 그렇게 살았는데, 살다 보니 참 수동적이 된 것 같습니다.


긴 글이라, 여기까지 봐주시는 분들은 제게 마음 많이 써 주시는 분들일 겁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마음 계속 써 주세요^^


우리는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반드시 잘 찾을 겁니다. 걱정하지 말고 삽시다.

2020. 10.29. 서른일곱 생일을 자축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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