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시대에 느림의 학문 철학을 생각한다.
요즘 인터넷 서점이나 블로그, 실제 서점을 보다보면 재미있는 풍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인문 코너 한켠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던 철학 서적들이 이제는 당당히 베스트셀러 진열대에 올라와 있는 것을 거의 매번 보게 됩니다. 얼마전 말씀드렸던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니체의 말' 등과 같은 책들이 꾸준히 베스트셀러의 상단에 있는 걸 보면, 분명 지금 이 시대가 사람들로 하여금 철학을 필요로 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흐름은 참 반가운 일입니다. 치열한 생존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그 안에서 무언가 '생각할 거리'를 찾고 있다는 것은 철학이 여전히 유효한 도구임을 말해줍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더 나은 삶, 더 흔들리지 않는 마음, 그리고 본질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열망으로 철학에 눈길을 돌립니다. 철학이라는 말이 더는 학문적인 상아탑 속에 갇혀 있지 않고, 일상의 언어로 스며들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그 흐름은 충분히 긍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는 개인적으로 작은 걱정을 하게 됩니다.
요즘 인기를 끄는 철학 도서들의 상당수는 ‘철학자들의 말’을 '요약하고 재가공한 해설서'에 가깝습니다. 물론 철학의 원전을 읽기 어려워하는 이들을 위한 입문서로서는 그 역할이 분명히 있습니다. 철학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에게 한 발짝 들어올 수 있는 문을 열어주는 역할도 분명히 하고 있고요. 하지만 문제는, 많은 독자들이 그 단계에만 머무른 채 철학을 소비의 대상으로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 쇼펜하우어는 인생이 고통이라고 말한 사람이구나.”
“니체는 그냥 무신론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주장한 사람이지.”
“사르트르는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고 했지, 그거 멋있잖아.”
이런 식의 ‘정리된 문장’과 ‘자극적인 명언’만을 머릿속에 담고 철학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철학 본연의 깊이를 오히려 가리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철학은 그런 식으로 외워지고, 소비되고, 껍질만 가져가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도서를 읽는 다는 것은 그 철학자와 나 사이의 진지한 대화입니다.
저는 철학 독서를 ‘3단계 독서’의 가장 높은 단계, 즉 자기 창조적인 독서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닌, 나의 생각을 깨뜨리고 다시 만들어가는 독서. 철학자의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나의 언어로 번역하고, 시대와 삶의 맥락 속에서 재해석하는 작업 말입니다.
철학을 읽는다는 것은 그 철학자와 한 자리에서 차를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플라톤의 '국가'를 읽는 것은 단지 고대 그리스의 정치 제도를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와 인간 존재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기 위함입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는 이유는 그저 "신은 죽었다"는 명제를 외우기 위함이 아니라, 왜 그가 그런 생각에 도달했고,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지를 탐구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저는 요즘처럼 '철학 입문서'들이 범람하는 시대일수록, 원전을 향한 접근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낯선 개념, 무거운 문장, 복잡한 문맥이 독자를 거부하는 듯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타인의 사고방식을 깊이 따라가 보며 나 자신을 재구성할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숨겨져 있습니다.
"진리를 사랑한다면, 먼저 자신의 무지를 사랑하라."
– 소크라테스
지금 우리가 철학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지 멋진 명언을 남기기 위함인가요? 아닐껍니다. 절대가치의 붕괴를 온몸으로 볻아들여야 하는 혼란스러운 삶 속에서 나의 나가갈 방향을 잡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 때문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렇다면 철학이라는 나침반을 더 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남긴 문장은, 단순한 지식이 아닌, 그들의 고뇌와 투쟁의 결과입니다. 그것을 가볍게 읽는다는 것은, 고심 끝에 던져진 그 한 문장을 ‘요약본’으로만 소비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철학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나는 왜 이 생각에 끌리는가, 나는 왜 이 말에 저항감을 느끼는가. 이런 물음을 통해 우리는 더 좋은 인간이 되기 위한 사유의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속도와 효율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철학마저도 쉽게, 빠르게, 정리된 방식으로 접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철학은 그 속도에 저항하는 학문입니다. 질문을 던지고, 다시 질문하고, 답을 내지 못하더라도 질문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학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철학을 소비하지 말고, 함께 대화하고 씨름하는 태도로 다가가야 합니다.
입문서를 읽는 것도 좋습니다. 좋은 철학 해설서는 철학으로 들어가는 문이 됩니다. 하지만 그 문을 통과했다면, 이제는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할 때입니다. 철학을 ‘읽는 것’이 아니라, 철학과 ‘함께 생각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독자들이 많아지길,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