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시험보는 학생들직보가 끝나고 간만에 혼자 학원에 남아 예전부터 생각했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점점 더 자주 마주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특정 이념이나 개념에 대해, 마치 진리를 선언하듯 단언하는 모습입니다.
"공산주의" 라는 단어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개인적으로 힘들긴 했지만, 정말 잘읽었다는 책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저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입니다.
석사 공부하던시절 주전공인 금융공학보다도 저는 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는데요. 그때 지도 교수님도 이분야에 대해 관심이 많으셨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 인터넷을 보면 댓글들 수준의 참담함을 목도하게 됩니다. 안보려해도 내리다보면 보게 되어 안볼수가 없죠.
이런 글들 중에서 볼때마다 참 견디기 어려운 댓글이 공산주의에 대한 사유없는 비난과 조롱입니다
이러한 댓글들은 겉보기에 단순한 주장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심각한 문제의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철학적 고민과 사유의 빈곤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말의 무게와 언어의 역사를 고려하지 않은 '아무말'이 지배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신조어라면 그럴수 있다고 합시다. 그렇지 않은 오래된 역사적인 용어를 개념의 정반대에 있는 뜻으로 사용하는건 정말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오래전에 박근혜 전대통령이 한 "비정상의 정상화", 안철수씨의 "극중주의", 그리고 얼마전 어떤 변호사가 얘기한 "계몽", 오늘 얘기해보고자 하는 "공산주의" 모두 동일한 선상에서 우리가 고민하고 그 깊은 뜻에 대해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공산주의 = 독재"라는 착각을 합니다.
공산주의를 떠올릴 때 북한, 소련, 마오쩌둥의 중국과 같은 체제를 떠올리며, 자연스럽게 "공산주의 = 독재, 억압, 전체주의"라는 등식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이론과 현실, 철학과 정치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구상했던 공산주의는 결코 독재와 같은 체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말한 공산주의는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한 이후, 계급이 해소되고 생산수단이 공유되는 궁극적인 해방의 상태였습니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자의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의 이상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등장한 이른바 '공산국가'들은 대부분 자본주의적 발전을 거치지 않은 채 정치적 권력만을 쥔 독재정권에 불과했습니다. 마르크스가 비판한 자본주의의 구조를 해소하기도 전에, 권력의 집중과 통제를 통해 사회를 운영하려 했고, 결국 그것은 공산주의의 이름을 빌린 독재주의로 귀결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비판해야 할 대상은 공산주의 자체가 아니라, 그 이름을 빌어 권력을 사유화한 독재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단순히 비판하기 위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자본주의의 본질을 분석하고, 그 모순을 구조적으로 드러낸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였습니다. "자본론"을 통해 그는 잉여가치, 노동소외, 축적의 불균형, 계급 간 불평등 등 자본주의가 가진 내적 문제를 치밀하게 분석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단지 과거의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빈부격차, 노동 착취, 청년실업, 주기적 금융위기 등 마르크스가 지적했던 구조적 모순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자본주의는 마르크스를 단순히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제기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복지국가, 사회보장제도, 시장 규제 정책 등 제도적 보완장치를 도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날 살고 있는 수정자본주의 혹은 혼합경제 체제입니다.
당연히 현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는 꽤 많은 부분에서 마르크스를 흡수합니다. 오죽하면 영국의 역사학자 토니 져트는 "마르크스를 이기는 가장좋은 방법은 그의 견해를 반쯤 수용하는것" 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케인즈는 그의 저서 "일반이론"에서 국가의 시장개입을 말했으며, 실제 현대 대부분의 나라에선 그렇게 하고 있죠.
결국,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무너뜨린 인물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반성하게 만든 철학자였습니다.
언어는 사고의 경계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단지 표현의 수단이 아닙니다. 언어는 사고의 구조를 형성하고, 우리가 무엇을 볼 수 있고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를 규정합니다.
"공산당 나빠" 같은 말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공산주의를 이념적 고민 없이 감정적 반사신경으로만 반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말이 진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생각해 볼까요?
1. "공산주의가 나쁘다"는 말 속에 정치체제에 대한 분석이 있는가?
2. 그 체제가 등장한 역사적 맥락은 고려되었는가
3. 혹은 그 말은 단지 프레임에 갇힌 채 비판할 수 없는 구조를 강화하는 역할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말은 생각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아무 고민 없는 말은, 오히려 생각을 죽입니다.
이념을 비판하려면, 먼저 그 이념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며,
그 이름을 욕하려면, 그것이 처음 어떤 철학과 이상을 품고 있었는지부터 되짚어봐야 합니다.
철학 없는 비난은 사유의 종말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마르크스를 부정하면서도 그의 사상을 일부 채택한 혼합체입니다.
공산주의라는 이름 아래 실패한 많은 체제들은 실제로는 공산주의가 아니었고,
자유민주주의를 자처하는 체제들도 그 이름 아래 불평등과 억압을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떤 체제를 이야기할 때에도,
그 체제의 이념적 뿌리와 역사적 현실을 구분하는 사유의 힘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철학 없이 던지는 한마디는 강력한 레토릭일 수 있지만,
그것이 사람들의 사고를 멈추게 하고, 토론의 가능성을 봉쇄한다면
그건 결국 사유의 종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한 문장으로 정의할 수 없는 수많은 철학과 역사, 경제적 구조와 권력의 역학이 맞물려 돌아갑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 많은 질문을 던져야 하며,
더 자주 ‘말의 무게’를 고민해야 합니다.
마르크스를 읽는 이유는 공산주의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의 자본주의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을 아끼는 이유는 침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책임 있는 사유로 나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고민이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사유의 끝이 아니라, 사유의 시작을 향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