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에게 배신감을 느낄때.

마흔이 돼서야 깨달은 삶의 이치를 고전의 대화를 통해 말하다.

by 이로


“그럼 아니란 말이에요?”
“전혀 아니야.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이야”
“당신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에요. 사기꾼일 뿐이죠.”
“맞아! 난 사기꾼이야.”



오래된 한국영화 중에 <넘버 3>라는 영화가 있었어. 개봉 당시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킨 영화였지. 당시 사람들은 배우들의 명연기와 명대사를 줄줄 외우며 따라 하기 바빴지.

특히 배우 송강호 씨의 대사가 한창 이슈가 되었는데 그중에 이런 대사가 있었어.


“내 말 토토토토다는 새끼는 전부 배반형이야 배반형 배신! 배반형”



자신이 하는 말에 이러 쿵 저러 쿵, 토 다는 부하는 무조건 나에 대한 배신이라며 일갈을 날리지. 당시엔 그저 웃고 넘겼지만, 임춘애를 현정화로 잘못 말한 자신을 지적한 경우에도 배신감을 느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왜냐고? 그는 보스였으니까.





아무튼, 사람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배신의 기준은 다를 수 있겠지만, 보통 타인이 자신과 한 약속을 어길 경우 우리는 배신이라는 말을 하게 되지.


그런데 도로시의 경우는 배신이 아닌 사기를 당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몰라. 배신은 자신이 잘 아는 사람에게 당하는 것이지만 사기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당하는 것이기 때문이지. 물론 당사자에겐 그것이 배신이든, 사기든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겠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배신과 배신감은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고 해. 실제 배신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이 상대방에게 배신당했다고 느끼면 일어나는 것이 배신감으로,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해주면 그만큼 자신에게 더 큰 무엇이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이지. 그래서 상대방에게 지나치게 잘해주는 사람일수록 쉽게 토라지거나 배신감을 느낄 확률이 높아진다고 해.


배신은 어떤 대상이 자신에 대한 믿음이나 의리를 저버렸을 때 발생되는 심리상태야. 다시 말해 믿었던 사람에 대한 기대가 깨졌을 때 느끼는 감정인 거지.


배신하면 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마르쿠스 브루투스 야. 그는 폼페이우스의 편에 선 자신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살려준 카이사르를 배신하고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카이사르를 죽이게 되지.


카이사르는 그 유명한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명언을 남기게 되는데, 그가 만약 미리 눈치채고 대비했더라면 “브루투스, 네가 그럴 줄 알았다” 또는 “브루투스, 네가 그런 놈인 줄 알고 있었다” 는 명언으로 바뀌었을지도 몰라.




이렇게 배신은 상대방이 작정하고 나에게 ‘배신할 거야’ 하고 말하거나 행동하면서부터 시작되지. 그럼 배신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 모두 오해 없이 확실하게 배신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거야.


그런데 문제는 배신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해 준 대상이 자신의 말이나 행동으로 인해 상대방이 배신이라는 감정을 느낄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는 사실이야.


즉 자신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배신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반면, 반대로 배신당했다는 감정을 경험한 사람은 대다수를 이룬다는 사실이지. 참으로 아이러니한 순간이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은 배신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하나하나 기억을 되살려 따져본다면 본인도 모르게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실은 여기저기서 드러나기 마련이지.


그렇다면 왜 배신당한 사람은 있지만 배신한 사람은 그런 적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건 바로 자신의 행동은 그럴만한 이유나 동기부터 생각하지만 상대방의 행동은 결과나 현상부터 보기 때문이라고 해.


자신에게는 누가 봐도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고 상대방은 원래 목적 자체가 불순하기 때문에 배신했다는 논리지. 바로 자기 합리화를 통해 상처 받지 않으려는 일종의 자기 방어기제 인 거지.





그렇게 배신은 나와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주로 받는 감정이지만 항상 타인으로부터 발생되지는 않아. 본인도 모르게 배신이라는 감정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생되기 때문이지.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따라왔어. 모든 일은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달렸고 노력하지 않으면 그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어른들은 말해왔지.


물론 틀린 말은 아니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려면 일정 부분 노력이 필요한 건 사실이니까. 그런데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적용될 수 있는 말일까 생각해봤어. 예전처럼 열심히 노력하면 남들처럼 먹고사는 걱정 없이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세상은 이미 변했고 또 변하고 있어.


청년들은 ‘N포 세대’ ‘헬조선’ ‘민달팽이 세대’와 같은 신조어를 만들며 세상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조 섞인 말들을 만들어 내고 있지. 일명 ‘노오력’이라는 걸 아무리 해도 취업이나 결혼, 집 장만 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보다 어려운 시대를 반영하고 있어.


그들은 자신이 부족해서, 이루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노력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 거야. 그것이 과연 그들만의 문제로 국한될 수 있는 것일까? 시대가 만들어 놓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문제인 줄도 모르고 무조건 노력이 부족하다고 개인 탓으로 몰아가는 것이 제대로 된 사회일까? 이렇듯 노력은 우리가 기대하는 멋진 결과가 아닌 실패라는 배신으로 나타나기도 해.


그럼 우리가 공들인 노력에 대한 배신이라는 감정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외적인 문제가 존재한다면 원인을 찾아 해결해야겠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던 노력과 결과에 대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 다가 온 같아.


우리는 일을 하든, 놀이를 하든 어떤 과정의 즐거움에 빠지게 되면 몰입이라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에게 빠져드는 순간. 무아지경의 순간에 빠지게 되면서 그 행위 자체로의 즐거움과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데 바로 거기, 그 순간에 우리가 조금 더 큰 의미를 두는 것은 어떨까?


눈에 보이는 결과를 위해,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것도 의미 있지만, 과정 속에서 본인만이 느끼는 즐거움이나 몰입, 보람 등에 의미를 좀 더 둔다면 설사 안 좋은 결과가 우리의 뒤통수를 향해 달려오더라도 그 충격은 조금 덜하지 않을까? 그리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반등의 힘도 얻을 수 있을 거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익이나 목적, 그리고 가치관에 따라 생각이나 행동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과 자신의 노력이 배신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 들 수 있다면 그것이 결국 나와 타인의 배신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낼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이 순간에도 배신은 동전의 양면처럼 우리와 함께 숨 쉬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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