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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림 May 25. 2024

순간에 살다 영원을 잊다

미술관의 그림들은 차분히 감상할 여우가 없다. 마음은 늘 바쁘고 사람들은 휴대폰 셔터를 누른다. 그림은 보는 것이 아니라 어느새 찍는 것이 되었다. 풀꽃처럼 그림도 자세히 오래 보아야 여운이 남는 경우가 많지만.


복사된 그림을 오래 간직하고자 찍기에 골몰하느라 정작 그 순간의 추억을 마음속에 담아둘 겨를이 없다. 여행지에서도 남는 건 사진이라며 셔터를 눌러대다 그 공간이 뿜어내는 향기를 느낄 여우가 없다. SNS에 멋진 풍경들을 옮겨 뽐내고 싶은 마음이 그 순간의 기쁨을 앗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뭔가를 포장하고 미래를 위해 유예하려는 심리 속에 현재의 풍부한 존재감은 실종되고 작게 쪼개진 순간만 남는다. 그래서 순간들은 단절되고 영원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것이 일상이 아닌가 회의가 들 때가 많다.


현대 도시의 삶에서 온전한 주관은 늘 상처를 입기 쉽다. 남들처럼 덩달아 트렌드를 좇아가며 허덕일 때 영원과 맞닿은 나는 흔적 없이 사라진 듯 느껴질 때가 있다. 많이 관람하는 영화, 많이 쓰는 제품을 쓰지 않는다고 그 존재가 소멸하지는 않지만.


포장된 언어로 한 겹 감싼 말들에 포위된 채 한 잔을 권하다 집에 오는 길은 허전하다. 맨얼굴의 내가 아름답지 않을까 두려워지는 이런 마음이 삶의 충만한 기쁨을 늘 방해한다. 돈벌이, 온갖 이해관계, 친족들 간의 의무, 심지어 친구 사이의 알량한 자존심 경쟁까지도 늘 영혼의 깊은 심연을 응시하는데 방해요인이 된다.


동창회에서 오랜만에 본 친구들의 모습도 여전했다. 인생의 본질은 나답게 사는 것일 수 있겠지만 그 '나'를 잃어버리고 잘 찍힌 사진처럼 포장된 나를 전시하려는 심리는 슬잔을 부딪치고 혀가 꼬여도 쉽게 사그라들지 않은 듯했다. 부처가 존경받는 건 왕자의 허울을 벗고 영원을 사는 지혜를 구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눈에 비친 모습을 위해 억지스럽게 살아가는 의무의 노예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늘 비교할 수 없는 자신을 다른 이들과 같은 저울에 올려놓고 괴로워하지는지도 모른다.

 

https://www.youtube.com/watch?v=Wx-vULeWy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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