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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림 Jul 22. 2021

해는 뜨면서 진다.

축 결혼’ 봉투를 전할 장면에서
착각하고 '부의' 봉투로 잘못 전했다며
실수를 걱정하는 후배에게 했던 말이
새삼스럽다.


“어떤 면에서 보면 그것이 그것이다.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고

하지 않았던가”하고
우스개를 섞어

위로의 말을 전한 적이 있다.


스포츠 경기 우승자의 눈물은

쉽게 볼 수 있다.
인생을 바꾸는 상금과 함께

스타덤에 오르는 인생 최고의 순간에
극단의 기쁨을 누리는 선수의 상당수가

눈물을 흘린다.


부모도 자식의 일이 잘되고

그 극단의 기쁨을 누릴 때
몰래 눈물을 훔친다.
이 경사스러운 날 왜 울고 그러냐며
철없이 어머니를 놀려준 기억이 새롭다.


‘절규’의 작가 뭉크와
행복의 순간을 즐겨 포착했던

르느와르 그림은 극단에 서 있다.
삶에서 행복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뭉크.
자신의 그림을 매단 벽마저도

행복을 느꼈으면 했던 르느와르.


각각은 다른 색깔의 삶이었기에
어떤 삶이

더 우월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누구나 영원할 것처럼 따스한

엄마의 품을 떠나게 될 것이다.
언젠가는 닥치게 될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시간에.


아들을 유난히 사랑했던

친구 어머니의 죽음 이후
독신주의자로서 결심이

더 굳어졌다던 친구가 있다.
친구는 자식이 생긴다면

이런 이별의 아픔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결코 결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무슨 궤변이냐고 하면서도
그 쓸쓸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삶의 극단은
극한의 기쁨과 불안이 교차하게 만든다.

눈부신 딸의 아름다움을 보는 아빠라면
많은 늑대의 유혹을

어떻게 견딜지를 걱정할 것이다.


영화 ‘대부 3부’에서

흉탄에 쓰러지는 딸을 보고

오열하는 알 파치노를 보았다.


사촌과의 금지된 사랑이나마

실컷 하지 못하게 한

회한에 몸부림치며
차라리 딸 대신

자신이 죽었으면 하는 듯

극한의 슬픔이 배어있는 모습이었다.
찬란한 아름다움도 결코

영원한 희극으로 남을 수는 없는 것이다.


진지하게 바라보면  
어떤 것이 진정한 기쁨이고
어떤 것이 슬픔인지 구별이

선명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렇게 구별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혼돈’ 자체를

담담히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삶의 내공이 아닐까.


장엄한 일출의 순간에도

이미 일몰이 잉태되고 있다.

서해 쪽 당진 왜목에서는

일몰과 일출을 다 볼 수 있다고 한다.
언젠가 거기서

극단을 견디는 지혜를 배워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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