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돈 되는 일에는
목을 길게 빼고 달려들지만,
어떤 무형의 가치를 찾는 것은
밑도 끝도 없거나
하찮은 일로
치부하는 사람들을 본다.
생계를 위한 총총한 발걸음이
급해 보이는 사람이 아닌데도
사회의 공동선이나 시민으로서
기꺼이 살펴야 할 가치를
망각하는 경우가 많다.
나아가 문학이나 예술작품 앞에서
소년과 소녀가 되는 시간을
자신의 인성을 다듬는
정말 소중한 시간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본다.
가끔 어린이처럼
솔직하게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분이 있다.
이 선배는
자신은 침실에 책을 쌓아 놓고 사는
다독가에 애서가이자
문학소년 같은 면이 있다.
선배는
최근 읽은 단편소설 내용을
전해 주다가
그만 눈물을 보인다.
나는 듣다가 그것이 현실인지
소설의 이야기인지
착각하며 그분을 응시했다.
한참 말이 끊어지고
눈물을 훔치는
침묵의 시간이 흐른다.
선배는
그 이야기가
자신의 삶과 맞닿아 있어서
그랬을지 모른다며
쑥스런 미소를 짓는다.
톨스토이가 차이코프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를 듣고
흘린 눈물도 이런 유형이 아닐까.
아마도 완전히 몰입하고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이 없으면
이 사나이의 눈물도 없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싸나이'가
가짜로 지어낸 소설의 이야기,
"그깟 클래식 선율" 하나에
눈물을 흘리는 게 말이 되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다.
예술과 문학 작품에 몰입하고
때로는 눈물도 흘리고
그렇게
어린이가 되는 시간을 가진다면
그 누구도
인성이 나빠지기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좋은 인성의 완성은
문학작품에 감동받을 수 있는 눈물,
예술작품을 보고
스탕달 신드롬을 일으키는
그런 마음이 있는 곳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동양의 성현 맹자가
우물에 빠지기 않게
아이를 구하는 마음에서
'성선설'을 찾았듯
예술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라는 개념을 발견했다.
때로 예술은
밥 먹고 사는 문제에
너무 무력해서 그런지
쓸모가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인간이
먹고사는 걸 넘어서
동물과 구별되는 지점에
예술이라는 마음이 있다.
영화관에서
남몰래 눈물을 흘렸던 것은
부끄러운 일만은 아니었다.
도니제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 중에
"남몰래 흘리는 눈물"의 정서를
알거나 모르거나
자신이 '싸나이'거나 아니거나
관계없이.
감동적인 작품 앞에서
눈물마저 말라서
흘리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슬픈 일이 아닐까.
어른이 된 자신의 몸에도
동심이 제법 들어있었고
그것이 순수하고
영원히 젊게 살 수 있는
묘약이 되어
흘리는 눈물일 수도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