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연주회의 아름다움

음악을 누리는 기쁨

by 호림

코로나19 시대는 공연계의 비극이기도 하다. 많은 연주자들이 무대를 잃었고 관객들은 연주자와 호흡하는 음악회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이제 일상 회복 프로젝트로 공연계도 큰 기지개를 켜며 갈증을 해소하려는 관객들의 발길도 늘어나고 있다. 클래식 음악 공연의 상징과도 같은 오케스트라 공연은 풍성한 음량과 조화의 아름다움을 극한으로 느낄 수 있는 웅장한 사운드가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한다.


그렇지만 그 조화로움이 주는 즐거움은 많은 수고로움이 따라야 한다. 많은 시간 리허설을 통해 완성도를 높여야 하고 유명 오케스트라의 초청 공연의 경우는 걸맞은 대접을 해줘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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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따르는 부대비용은 고스란히 티켓값에 반영된다.무대 뒤의 애환도 공연 관계자의 애를 끓이게 만든다. 오페라 또한 그 사이즈가 커서 움직임이 무겁다.

그래서 스스로가 '하는 음악'을 즐기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작고 소박한 한옥에 옹기종기 친구들을 앉혀놓고 현악 4중주나 소수의 구성으로 앙상블을 즐긴다. 모처럼 가을향기가 물씬 나는 소박한 장소에서 이런 즐거움을 누리니 일상의 피로도 날아갔다.


대형 공연장에서는 2시간가량 숨죽인 채 집중해 듣고 아쉬움을 달래는 앙코르 박수를 거의 의무적으로 치게 된다. 마지못한 듯 불려 나온 지휘자와 연주자가 준비한 앵콜곡을 연주하는 루틴이 끝나면 총총히 연주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일상이다. 사실 소통과 공감이라기보다는 깊은 '고립감'이 마음 한편에 있다.

'하우스 콘서트' 같은 작은 음악회는 관객과 연주자의 고립이 없다. 같이 즐기며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연주자가 설혹 실수를 해도 너그럽게 넘어가기도 하고 연주자가 친절한 설명을 곁들이며 음악의 문턱을 낮추고 듣는 이의 소외감을 줄여준다.


멘델스존의 누나 화니 멘델스존은 이런 작은 콘서트를 즐겼지만 작곡 실력도 상당했다고 한다.

화니는 주말마다 지인들과 파티를 즐기듯이 음악을 즐겼다. 우리가 아는 동생 펠릭스 멘델스존은 무수한 명곡을 작고하고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 적극 참여하며 큰 음악회에 공을 들였다. 여성 음악인 배출을 꺼리는 아버지도 그렇고 그 당시 사회분위기 탓에 화니가 작곡한 상당수의 음악은 펠릭스의 이름으로 출판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음악학자도 있다.

작은 연주회에는 머리를 쥐어뜯는 창작의 고통과 피나는 연습보다 일상의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미숙함이 묻어나는 음악의 모습이 보인다. 숨 막히는 암실에서 2시간의 부동자세를 견디기보다 웃으며 공감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작은 콘서트의 힘은 결코 작지 않다.


음악사에서 재주꾼으로 바이올린, 피아노 연주는 물론 오케스트라의 웬만한 악기는 다룰 줄 알았고 대중을 위한 곡도 많이 작곡하려 한 이가 독일의 작곡가 힌데미트다. 힌데미트는 스승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너는 왜 자꾸 희한한 곡만 쓰려고 하지? 재능도 괜찮은데 말이야"하면서 핀잔을 주가 힌데미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선생님은 선생님의 음악을 쓰십시오. 저는 제 음악을 쓰겠습니다."라고 했다.

음악의 권위에 겁먹고 질식하거나 또 "자고로 음악은 이렇게 웅장하고 엄숙해야 혀"하면서 무거운 스타일을 강요하는 것도 '즐거움'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예술 참여 동기를 앗아가지는 않을까 한다. 가을의 작은 음악회는 이런 본질적이고 미학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펠릭스보다 화니가 음악을 충분히 즐기면서 삶을 풍요롭게 사는 지혜를 가졌던 것이 아니었을까? 물어보고 싶어도 지하의 멘델스존 남매는 응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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