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합과 연결의 예술, 미디어 아트
미디어 아트는 응용과 융합의 예술이다. 거기에 판타지를 자극하는 힘이 우리의 시선을 붙잡는다. 최근 본 전시는 신비감이나 흥미를 자극하는 요소들이 있어서 흥행에 성공한 듯하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지만. 새로운 것과 창의성의 본질 중의 하나는 연결과 융합이 아닐까 한다.
유화는 잘못된 채색을 바로잡으려는 덧칠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일필휘지'라는 말이 유화에는 잘 통하지 않는다. 동양화에서 붓으로 난초나 멋진 글씨를 단숨에 휘갈겨 완성하는 것과는 형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이폰의 스티브 잡스는 결코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않았다. 연결하고 단순화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다. 그런 면에서 융합과 연결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미디어 아티스트다.
최근 다녀온 커다란 미술관에는 크고 작은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지만, 작은 그림 한 점이 시선을 붙잡는다. 피카소의 작은 도자기 그림 한 점의 아우라가 가대한 설치미술들을 압도했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대가가 평생에 걸쳐 빚어낸 '스토리'가 주는 '아우라'는 쉽게 뛰어넘기 힘들 것이다.
회화나 음악을 포함해 예술의 특정한 유파를 창시한 사람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모험가였다. 판을 뒤엎은 배짱을 가지고 때로는 인고의 시간을 버텨냈다. 가지 않는 길을 가는 모험심이 없다면 우리는 오늘 거의 천편일률적인 예술에 등을 돌리고 새로운 빛을 찾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패션이나 학문, 모든 분야에는 시대별로 지배적인 사조가 있고 그 새로운 싹은 지금도 어디선가 움트고 있다.
이미 닥쳐오는 미래를 우리가 체감하지 못할 뿐이다.
- 윌리엄 깁슨(미국의 SF 소설가)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고안할 때 냉소하며 쇳덩어리가 하늘을 나는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을 것이라는 단정적인 예언들이 대부분이었다. 가장 멍청한 예언가로 분류되는 이의 "세상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이 발명되어 더 이상 발명될 것이 없을 정도"라는 말은 이제 코미디가 되었다.
혁신은 대단한 석학의 위대한 발상 속에서만 태어나지 않고 때로 일상에서 잉태될 수도 있다. 지금은 통신 혁명으로 그 말도 생소해진 '전보'가 있었다. 그 비용을 글자 수로 환산하던 시절이었다. 가난한 시골 할머니가 객지에 있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전보를 쳐서 알리느라 고심한다. 없는 돈에 글자 수를 줄이려고 묘안으로 나온 카피는 예법에는 어긋날지 몰라도 간결한 저비용 전보 메시지로는 그만이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지금 급히 집으로 오너라" 이 긴 문장을 딱 네 글자로 압축했다. '아버지 깩'이라고. 때로는 궁즉통이다.
깊은 사유에는 언제나 시기의 문제는 있어도 진정한 보상이 따른다. 생각을 깊이 하다 보면 해법은 따라 나온다. 평면에 구현한 피카소의 입체도 빛의 흐름을 포착한 모네의 인상주의도 그랬다. 모네는 날씨가 추워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부분의 그림을 야외에서 그렸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이 사물에 어떤 형태로 비치는가를 감각적으로 포착했다. 실내에서는 도저히 사물과 햇빛이 빚어내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포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모네의 '수련'을 보면 김훈이 떠오른다. 산문집 <자전거 여행>에서 수련이 피는 과정을 하루 종일 연못가에서 관찰하고 그 기다림의 시간을 '숨 막히는 허송세월'이라고 표현했다. 얼마나 멋들어진 말인가. 프랑스의 화가 모네가 김훈에게 이심전심의 미소를 지을 문장이 아닌가 싶다.
맨땅이나 다름없는 출발선에서 사업을 일구는 분들을 가끔 본다. 숨 막히는 인고의 세월을 미래의 기약 없는 보상의 시기와 바꾸기 위해 뛰고 있었다.
우리말의 묘미가 묻어나는 말이 생각난다. "이 세상에서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일은 '죽었다 깨어나는 일'이다." 죽었다 깨어나는 일이 아니라면 한번 가능성을 보고 용감하게 도전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런 사람들의 기를 죽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이들은 미디어 아티스트보다 광활한 영역에 걸쳐 일하는 라이프 아티스트들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