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예술을 배울까?
아름다움이라는 그 막연함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일까. 화랑가를 걷다 문득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본다.
예술의 가장 큰 의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상상하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아닐까. 어떤 갤러리스트는 자신과 관계있는 화가가 그림 거래를 위해 구매자에 설명이 필요한데 입을 닫거나 적절한 제목을 붙이지 못할 때 답답하다고 한다.
김춘수 시인에게는 꽃도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캔버스에 남긴 의미 없는 붓질과 명작의 차이는 이런 의미 부여의 마술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닐까. 어쩌면 너무나 단순한 이우환의 점과 선, 김창열의 물방울을 흉내 낼 화가는 많겠지만 화가의 고유한 아우라와 꾸준히 구축해 온 작품 세계는 아무나 따라 하기 어려운 것이다.
앤디 워홀의 켐벨 수프 캔 깡통이 ‘팩토리’라고 불리는 작업실에서 그의 조수들이 여러 장 만들어 수만 불을 받고 팔 때 평론가들은 이렇게 비아냥대기도 했다. “그냥 캔 통조림이라면 따서 먹을 수도 있지. 캔버스에 그린 이 통조림은 아름답기는커녕 쓰잘데기 없는데 왜 이리 비싼 거야”
그렇지만 워홀의 작품은 평론가들이 1년 떠들어도 벌 수 없는 것들이 수두룩하니 누가 승자일까. 예술은 음악 미술 같은 특정한 형식을 지니지만, 전통을 따르되 부단히 부정하는 아방가르드 정신도 내포한다. 상품의 디자인이나 유행의 변천사를 보면 인간은 늘 새로움을 찾아왔다.
얼마간 상업적인 부추김이 광고나 마케팅으로 부단히 이어졌다고 하더라도.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이 예술을 변화시키고 나아가서는 문명을 발전시키는 엔진이 되었다. 외계인들이 보면 인간을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예술이 아닐까. 눈썹이 없는 그림 한 장을 최고의 예술품이라고 하고 캔버스에 어지럽게 보이는 붓질이 그렇게 아름답다며 수백억 원을 주고 거래한다.
200억 원을 넘는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얼마나 대단한 소리를 낼까. 악기 하나가 도시의 아파트 10채와 바꿀 수 있다니 신기한 종족들의 ‘가치 놀음’을 아마도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부단히 가치를 부여하는 신기한 종족들은 자신들의 치기 어린 유희를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면서 호기심에 가득 찬 눈동자를 반짝인다.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가리는 건 우리 마음에 예술이 들어갈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완고한 마음일 것이다. 예술이 들어올 자리에 문을 닫아걸고 사는 것. 달리 말하자면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호기심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고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자신의 의식을 꽁꽁 묶을 때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