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의 시공간을 무한으로

예술가의 일

by 호림

예술은 유한한 시간과 공간의 아름다움을 무한으로 옮기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계절이 바뀌면 자연도 옷을 갈아입습니다. 꽃은 지고 나무도 색을 바꿉니다. 우린 그 아름다움의 순간을 영원히 붙잡아두려고 사진으로 영상으로 남겨두려 하기도 합니다. 또 그 순간을 포착해 사각의 캔버스에 영원히 가둬두려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도 있습니다.


자신의 귀여운 자녀의 재롱을 보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부모, 터질 것 같은 청춘의 한순간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하는 젊음도 무수히 봅니다.

살아있는 것의 아름다움은 유한하지만, 그 유한을 무한으로 만드는 작업이 예술이 아닐까요. 때로는 신화의 세계, 추상의 세계도 예술로 현실에 구현됩니다. 니체는 신화의 의미를 인간의 실존을 버티기 위한 꿈의 산물이라고 했습니다.


예술 또한 인간에게 또 다른 신화가 아닐까 합니다. 예술이 없으면 팍팍한 현실을 어떻게 견딜까요. 인간의 이런 예술 본능은 작품에 이야기를 입히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숭배하는 지경까지 가게 만듭니다.

그리고 무한의 시간을 살 수 있도록 보관합니다. 그 인간의 욕망이 루브르와 대영박물관에는 무수한 식민지 예술품에 대한 제국주의 약탈의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습니다.


지구의 역사 45억 년을 하루하고 한다면 인류가 문명을 일군 시기는 자정을 채 5분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 태동했다고 합니다. 거기다 길어야 백 년 정도의 유한한 삶을 사는 호모 사피엔스는 가끔 욕망의 포로가 되어 아름다움을 포착해 영원히 붙잡아두려고 하다가 가끔 불행의 늪에 빠지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이성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은 영원히 자신의 집에 가두고 싶어 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상 자신이 그 이성에 구속되어 헤어지지 못하고 구속 수감되어 지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미술관의 화이트 큐브에 갇힌 그림은 잘 보존하면 그대로 영원할 수 있지만 살아있는 것들은 유한합니다. 호모 에스테우스는 그런 아름다움과 영원히 동거하려는 이상이 현실에서 벽에 부딪힙니다. 그래서 예술이라는 신화를 만들고 그 속에서 정신의 도피처를 찾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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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을 상징하는 작가는 누구일까요. 세계 곳곳의 독일문화원에는 '괴테 인스티튜트'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 괴테의 무게감을 증명합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한 작가의 회한이 자전적으로 작품에 담겨있기에 지역과 시대를 넘는 명작이 되었습니다. 만약 괴테의 사랑이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으로 파뿌리가 되도록 행복하게 살았던 이야기였다면 그것이 독일문학에서 나아가 세계문학의 신화가 되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베르테르를 찬찬히 읽으면 불완전함에 몸을 떠는 연약한 인간의 모습과 신 앞에 겸손해야 할 파우스트의 모습이 보입니다. 유한한 인생이 안타깝다는 듯 평생을 독신으로 사랑하며 고뇌한 괴테의 모습, 아니 예술가의 모습도 보입니다.

사랑도 늘 붙들고 살 수 없고 희열에 넘치는 순간도 영원히 늘어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호모 에스테우스에겐 예술이 무던한 사랑으로 우리를 듬직하게 껴안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문학, 음악, 미술의 이름으로.


지금 느낌이 좋은 사람도 나와 영원을 같이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영원의 시간을 붙들고 있을 것처럼

믿고 살다가 간혹 다치기도 하는 것이 사피엔스의 일입니다.

진정한 예술가는 이런 호모 에스테우스에게 주어진 유한의 시간과 공간에서 무한을 견디는 가치를 찾을 것입니다. 계절이 바뀌면 저 화려한 여름꽃들도 더 이상 벌과 나비가 찾지 않고 앙상한 가지만 남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