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어깨는 언제나 무겁습니다. 20명의 자녀를 너끈히 키운 음악의 아버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음악의 아버지이자 다둥이 아빠 바흐의 손은 쉴 틈 없이 오선지 위를 달렸습니다.
가족 사랑이 지극했던 아버지는 여기 또 있습니다. 병약한 몸(후일 음악학자들은 결핵으로 추측)으로 핼쑥한 얼굴을 한 채 런던으로 큰돈을 벌러 떠나는 이 아빠에게는 두 자녀와 아내가 있었습니다. 1970년대에 중동으로 떠나는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이 오버랩될 수 있습니다.
<마탄의 사수>로 바그너가 출현하기 전 이미 오페라 작곡가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했고, 드레스덴 궁정악장으로 활약하며 독일에서는 스타가 되어있었습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비하면 당시 초라했던 오페라 분야에서 독일 오페라의 자존심을 지킨 이가 칼 마리아 폰 베버였습니다.
베버의 아내 카롤리네는 런던으로 떠나는 약한 몸의 베버를 눈물로 환송하며 시선에서 멀어질 때 관 뚜껑이 닫히는 아픔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주기적인 각혈과 기침, 창백한 얼굴의 베버는 당시로서는 불치병이었던 결핵을 숨기다시피 하며 런던에서 악전고투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가족에게는 늘 템즈강을 유람하며 너무나 행복하게 지낸다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1826년 당시 베를린은 인구가 20만 정도의 소도시였고 런던은 100만이 넘었고 산업적으로도 활발하고 경제적으로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아무리 스타 작곡가였지만 음악인으로서 독일에서의 생활은 윤택하지 못했습니다. 베버는 돈을 벌어 가족을 호강시켜주겠다는 일념으로 영국의 습한 날씨를 견디며 작곡가와 지휘자로 돈벌이 무대를 찾았던 것입니다.
작곡과 지휘에 전념했던 베버는 고국을 떠난 지 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마흔에 삶을 마감했습니다. 베버는 가족 사랑이 담긴 이런 편지를 보내며 이국에서의 외로움을 견디며 병마와 싸우다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습니다.
콘서트 지휘를 맡았는데 100파운드 정도 남았소.
신이 당신과 아이들을 축복하시고 건강을 기원해주시기를......
베버의 음악적 깊이가 느껴지는 웅장한 선율은 그가 날아갈듯한 건강 속에서 작곡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만약 좀 더 화창한 날씨의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로 갔다면, 아마도 명작 오페라를 한 두 개 더 남길 정도로 조금이라도 오래 살지는 않았을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가장의 무게를 온몸으로 견딘 베버의 중후하고 멋진 선율이 아침을 깨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