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이라는 오만

by 호림

한 산악인은 에베레스트를 정복한다는 말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은 결코 자연을 정복할 수가 없다고 하며. 다만 히말라야의 신이 인간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발을 잠시 디디는 것을 허락했을 뿐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진리 또한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옛날 참고서에는 '완전정복'이라고 해고 나폴레옹이 말을 타고 산을 오르는 그 유명한 그림을 표지로 한 것이 있었다. 그렇다고 영어가 정복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눈 앞에 닥친 시험에서 백점을 얻을 수는 있다는 희망은 주었을 것이다.

"나는 안다"는 것은 어떤 특수한 영역에 지극히 제한되어야 하고 "나는 안다고 믿었다"로 고쳐야만 한다는 언어철학자 비트켄슈타인의 겸손을 배울 필요가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어떤 이인가? 재벌급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유산을 형제들에게 양보하고 철학에 귀의하다시피 해 그의 독특한 언어철학 체계를 위해 평생을 바친

학자다.

서양철학의 큰 저수지였던 헤겔은 "진리는 곧 전체"라고 한 바 있다. 대개 일부만 아는 인간들은 자신의 지식을 교묘한 방식으로 편집해 상대를 제압하려고 궤변을 늘어놓기 일쑤다. <장미의 이름>에서 움베르토 에코가 묘사한 노수도사의 연쇄 살인 이유는 진리를 독점하기 위해 학습하는 이들이 새로운 세계관을 가질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지성의 질서란 대개 선대의 그물이나 사다리를 통해 구축한 것이다. 진리에 이르면 진리를 위해 사용한 그물이나 사다리를 버리하고 한 이가 니체다.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고 하나의 관점일 뿐이라며 한 이가 니체였고 그는 신의 존재마저 부정했다.


동양에도 지적으로 부분적인 관점에 함몰되는 것을 경계한 이가 있었는데, 소동파 시인은 원근고저를 잘 모르는 것은 산 속에 우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실에 너무 근접해 있으면 진리를 알 수 없다. 조금은 떨어져서 볼 필요가 있다. 정치나 경제정책의 시비 또한 치열한 이해관계의 한 가운데서 잘 못보는 것이 분명히 있다. '확증편향'이라는 두터운 성을 쌓으며 상대의 말에 귀를 닫고 유뷰브 알고리즘에 이끌려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이들도 많다.


영원을 사는 예술은 오늘 시비를 다투지 않는다. 평론가의 재잘거림을 비켜나 수백년을 살아남은 <모나리자>의 미소에 진리의 답이 있는지도 모른다. <모나리자>는 라 조콘다라는 귀부인의 초상화라는 설이 유력한 가운데 골상학적으로 다빈치 자신의 자화상이라는 말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시비가 중요하지 않다는 듯 천재의 손길은 우리에게 묘한 미소로 답한다.


진리 앞에 겸손해지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다면, 또 예술 앞에 고개를 숙이는 이가 늘어난다면 세상의 하고 많은 시비나 총칼을 든 전쟁도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248) Beethoven - Egmont Overture, op. 84, Bernstein, Vienna Philharmonic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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