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꿈

표현을 예술로 만드는 언어

by 호림

생각이 에너지라는 광고 카피도 있다.


우리 두뇌라는 엔진을 가동해 생각이라는 에너지를 생산하는 연료는 대부분이 언어다. 물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그렇지만 세상의 그 많은 창조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은 생각의 도구, 즉 언어를 발전시킨 사람이 아닐까.

영국에서는 <캔터베리 이야기>의 제프리 초서도 우리나라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위상을 가진다. 인도와 바꾸지 않을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말할 것도 없고.


초서가 활동한 14세기에는 영국 왕실에서도 프랑스어를 문서나 일상어로 더 많이 쓸 정도로 영어의 위상은 초라했다고 한다. 한자어 위주의 문서를 쓰지만 우리말을 버젓이 쓰는 세종 때보다 더 열악한 상활일 수 있었다. 초서는 당시 귀족과 평민의 언어를 아우르는 작품으로 영어의 영역을 넓혔다.

셰익스피어는 평범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귀족사회의 언어부터 평민의 언어까지 두루 아우르는 단어를 사용해 극작을 했다. 그의 언어구사를 보고 어떤 사람들은 다른 귀족의 작품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없었다면 오늘날 세계 주류의 언어는 영어가 아닌 불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왜 셰익스피어와 영국과 왜 바꾸지 않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초서와 셰익스피어가 웹스터 사전을 뒤덮은 수만 개의 단어를 발견하고 작품에 활용해 사용하지 않았다면 지구 상에 펼쳐진 광대한 영어의 영토는 지금보다 훨씬 더 쪼그라져 있었을 것이다.

세종이 애써 만든 우리 생각의 도구 한글이 일제에 의해 사라지고, '벤또'을 까먹고 '오이시이' 하면서 일본어권에서 사는 건 정말 끔찍한 상상이다. 우리말의 과학성과 표현의 풍부함은 외국의 언어학자들도 인정한다고 한다. 독립운동에 애쓰신 선조들과 광화문에 앉아계신 세종대왕께 늘 고마운 마음이다.

곰곰 생각하면 우리말의 표현 하나하나는 예술이다. 음식의 달콤 쌉싸름한 이 맛을 어떨게 영어로 표현할까.

시어머니가 외국 며느리에게 집안일을 시킬 때 '걸레'와 '마룻바닥', '훔치다'는 단어는 알아도 걸레로 마룻바닥을 훔치라고 하면 도둑질을 하라고 하는지 알아듣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 며느리와는 고부갈등이 없는가 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영변 약산 진달래꽃을 아름 따다 뿌리는 우리 시에 나타난 정서의 오묘함을 알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 외국인들은 영변이 그 핵무기 시설이 있는 그곳인가 의아해하며 파고들 것이다.


뒤늦게 영어공부에 관심을 둔 선배가 영어로 꿈꾸는 수준의 몰입을 하겠다는 당찬 각오를 밝히고, 팔순을 바라보시는 어머니는 일본어 공부에 한창이다. 박수를 보내면서 생각의 새로운 연료를 주입하기를 응원했다.

언어는 가장 중요한 생각의 연료이자 미래를 꿈꾸는 도구이기도 하다.

원래 배우로 데뷔했던 셰익스피어는 자질이 부족함을 느끼던 차에 당시 1592년 유럽을 휩쓴 흑사병이 무대에 설 자리마저 앗아가 극작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거의 2년간 극장이 문을 닫아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창작의 시간을 벌었다. 어쩌면 생계를 고민하는 청년이 스스로에게 닥친 비극의 시간에 4대 비극 같은 불후의 명작을 잉태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길어진 '집콕'의 시간을 셰익스피어급 창작과 깊은 사색의 시간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코로나를 흑사병에 대입해 또 다른 셰익스피어의 탄생을 기대하는 건 슬픈 상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