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 속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진실하게 대해야 할 오직 한 사람만을 만나며 자신의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하버드대 교수를 버크민스터 풀러는 <새터데이 리뷰>라는 잡지에 이런 글을 기고했다.
나는 78세다. 그동안 천 톤이 넘는 물과 음식과 공기를 섭취했으며, 또 그만큼의 머리카락, 피부, 살, 뼈, 혈액을 폐기 처분해 온 나이다. 나는 3.2kg로 태어나 32kg , 72kg이 되더니 92kg까지 나간 적이 있다. 그러다 다시 32kg이 빠졌는데,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32kg는 누구였지? 난 여기 이렇게 건재하게 살아있는데."
내 몸에서 빠져나간 32kg는 1895년 뼈와 살의 재고 목록에 기재되었던 내 몸무게의 열 배에 해당된다. 최근 며칠 동안 먹은 음식의 무게를 모두 더한다고 해서 그때의 내가 되지는 않는다. 그 음식물의 일부는 잠깐 내 머리카락이 되었다가 한 달에 두 번씩 잘려 나갈 것이다. 오장육부에서 빠져나간 32kg도 '나'가 아니며, 현재 내 몸속에 남아 있는 원자들도 '나'가 아니다.
이런 내 몸에 겉치레의 지식과 물질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깊이 묻고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며 죽어간 푸른 눈의 전직 승려가 있었다. 스웨덴의 엘리트 젊은이가 유망해 보이는 장래를 접고 태국의 수도원으로 들어갈 때 부모들은 바짓가랑이를 잡고 말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17년의 수도생활 끝에 다시 환속해 스톡홀름에서 명상과 관련한 일을 하고 배우자도 얻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죽어가면서 쓴 에세이는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지음)였다. 그렇기에 우리는 결코 스스로가 절대자인양 남들을 재단하고 굴복시킬 권리가 없는지도 모른다.
버스카글리아도 그의 에세이에서 늘 타인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강조한다.
우리는 오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물질의 집합체를 '나', 혹은 '너'로 규정짓는 커다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사람이 눈을 감으면 부산한 저울질이 시작된다. 암에 걸린 빈곤층들은 아예 저울을 침대로 삼는다. 생전과 사후의 몸무게 차이는 허파에서 빠져나간 공기와 피부로 방출된 소변의 양에 불과하다. 목숨은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레오 버스카클리아 지음 이은선 옮김 p.146-147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며 죽어간 전직 승려의 에세이가 울림을 주었다. 월요일 새벽 많은 이들이 침대를 박차고 새로운 전투를 치를 준비를 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언제나 부서지기 쉬운 나약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비욘이 책에서 소개한 문구를 인용해 본다.
만나는 사람마다
네가 모르는
전투를 치르고 있다.
친절하라.
그 어느 때라도.
동료 승려가 유혹에 들 때 일화가 인상 깊다. 속세의 연을 만났을 때 위스키 한 잔을 권하는 짓궂은 이의 권유에 단호히 거부하자 술 권하는 이가 "당신은 출가 전 원래 술을 잘했고 지금 누가 보지도 않으니까 한 잔 하라"며 집요하게 권한다. 그러자 이 승려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의 아무도 못 보더라도 가장 중요한 단 한 사람, 나 자신은 보고 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