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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애가 왜 이렇게 게으르고 무뚝뚝하냐고 엄마에게 비난을 들었다.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는 밝고 명랑하다. 잘 지내는구나. 큰 안심이었다. 어차피 엄마의 비난이야 평생동안 들어왔던 거고 내게 중요한 것은 간만의 이 통화다.
"아 일하느라 바빴지! 그러는 엄마는 뭐 그렇게 되게 표현쟁이냐? 그럼 지금이라도 남사스럽게 사랑한다고 맨날 그러든지 말이야. 해볼까? 사랑해~ 사랑해~ 됐지? 좋지?"
엄마와 농담따먹기 하던 여느적처럼 나는 낄낄거리면서 틱틱거린다. 겉으론 서로 떽떽대는 듯 하지만 실은 여유가 깃든 감개무량한 대화다. 이 통화가 이루어지기 수개월 전 엄마는 병실에 꼼짝없이 누워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과의 싸움에 몹시 지쳐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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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과의 전쟁에서 적은 질병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병이 아닌 다른 병, 무심하고 거친 사람들, 있으나 마나 한 시스템, 모든게 합심하여 공격해 들어온다.
아빠는 입원해 있는 엄마를 24시간 간병하던 중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엄마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는 전신질환자라, 아빠는 지병에 고령이라 이렇든 저렇든 고위험군이었다. 입원하는 동안 코로나와의 싸움은 한두 번으로 그치지 않았고, 나는 걱정하는 수준을 넘어 극도의 예민함으로 하루에도 몇번 씩 폭발했다. 급기야 아빠의 차례까지 오고 말았을 때는 허탈하여 다리에 힘이 빠질 지경이었다.
병동 병실에 코로나 환자가 나오면 비상대응이 시작되지만, 비상시의 병원 시스템이란 없어도 문제, 있어도 문제다. 수시로 환자와 보호자의 감염 상태를 체크해주는 즉시대응은 고맙지만 그 나머지는 다 짜증스럽기 짝이 없다. 사람은 전부 싹 다 빼고 룰만 남아 지탱하는 곳. 깊이 생각하면 나만 손해인 곳. 병원 24시가 그렇다.
한 번은 엄마와 아빠가 있던 병실의 다른 보호자가 코로나에 감염되었는데, 엄마 아빠가 대피할 병실이 없어 십수 시간 코로나가 퍼진 방에 그대로 방치되는 일이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별 다른 조치가 없이 그냥 하루가 지나버릴 판이라, 나는 밤 12시 가까이 서울시, 질병관리본부, 보건소에 전화를 걸어 민원을 넣었다. 하나같이 지금 당장은 도울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럼 우리 엄마 그냥 이렇게 죽으라구요? 애꿎은 철야 근무자에게 못되게 쏘아부쳤지만 그만큼 간절하기도 했었던 밤이다.
'지 엄마여봐라 이렇게 하나...'
네 가족이면 그렇게 하겠나. 어디서도 통하지 않는 공허하기 짝이없는 논리란 것을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안다. 그 일은 내게는 안 일어날거고, 일어난대도 너랑은 관계 없으니까, 모두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만 같다.
이 와중에 천하무적 엄마는 입원 중 네 번 이상의 난리통에도 코로나에 감염되지 않았다. 아빠가 코막혀~ 목아파~ 하면서 집으로 쫓겨가는 동안 나는 부랴부랴 휴가를 내어 병원으로 향했다. 병실에 들어가니 엄마가 쌕쌕거리며 얌전히 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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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친구와 만나 시간을 함께 보낼 때 우리는 친구랑 논다고 한다. 대학 시절 종일 방에 쳐박혀 지내는 내게 지연아 엄마랑 놀아줘~ 하고 거실에서 엄마가 외치고는 했었다. 그러면 무뚝뚝한 나는 별말없이 굼실굼실 기어나와 엄마 옆에 붙어 앉았다. 의미있는 대화는 별로 없다. 이제 들어가서 너 할 일 해도 돼 하고 엄마가 말 할 때까지 나는 엄마 옆에 가만 앉아 티비를 봤다. 어릴 땐 분명 함께 산 사이이지만 언젠가부터는 함께 놀아야만 되는 사이. 자식과 부모 모두 그렇게 점점 자기만의 시간을 향해 가버린다.
"지연이랑 잘 놀고 있어? 뭐하고 놀고 있어?"
아빠는 입원 중인 엄마와 안부 전화를 할 때 항상 나와 잘 놀고있냐고 물었다. 병상에서 종일 자던 엄마가 잠깐이라도 의식을 차리면 이때다 하고 식구들에게 영상통화를 돌려야 한다. 엄마의 집중력이 유지되는 시간은 간신히 몇 분 정도이니 놓칠 수 없는 순간이다. 그래도 엄마는 그 짧은 시간동안 할 말은 다 했다.
"얘가 왜 좀 틱틱거리잖아."
엄마가 영상통화로 아빠에게 일러바친다. 아니? 와 이 엄마...!! 왜 잘해준 것은 하나도 안 말하는데? 내가 밥도 호호 불어 먹여주고, 물도 먹여주고, 양치도 시켜주고, 기저귀도 갈아주고, 마사지도 조물조물 해주고, 로션도 발라주고, 각질도 벗겨줫는데 와...! 아빠가 이 상황을 보더니 영상통화 너머로 우습다고 낄낄거렸다.
물론? 틱틱대긴 했다. 딱 한 번. 아니다 두 번인 것 같다. 한 번은 첫 간병 하던 날, 기저귀를 갈다가 몸을 가눌 수 없고 의식도 없는 엄마가 너무 무겁고 힘이 들어서, 한 번은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엄마의 모습이 너무 한심해서, 나도 모르게 가관이다와 같은 한숨 섞인 말들이 새어나왔는데 하필 그걸 듣고야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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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틱댄다는 건 초등학교 때부터 사춘기 내내 엄마에게 수시로 들었던 지적이다. 나는 10살 정도에 이른 사춘기를 맞아 이후 마음 들끓는 10년을 보냈다. 엄마가 내게 진지하게 너 틱틱거리는 말투 고쳐라고 했던 날도 10살 때였지 않았나 한다. 엄마와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던 중이었는데 앞 뒤 다 자르고 그 장면만 기억이 난다. 그런데 웃긴건 말이다. 틱틱대는 말투는 엄마를 닮았다. 확신할 수 있다.
병원에서 내리 잠을 자던 엄마가 잠깐이라도 의식을 찾으면 나는 엄마의 뇌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손뼉치기 놀이를 시도했다. 내가 짝 하면 엄마도 짝 하고, 내가 주먹을 쥐면 엄마도 쥐고, 잘 알았지? 사치기 사치기 사뽀뽀~ 하며 손뼉치기를 계속 시도하던 어느 날 엄마가 멍하니 눈을 뜨고 내게 조용조용 말했다.
"가관이다."
나는 눈이 똥그래졌다.
"뭐가 가관이야?"
"아빠가 쎄쎄쎄 하는거 보면 가관이라고 할거야."
그것봐라. 가관이다, 뭐 이런 말들 다 엄마 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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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꾀꼬리같이 예쁜 목소리를 가졌고, 낙천적이고 명랑하고 밝은데다, 사람들에게 늘 친절한 센스쟁이였다. 그렇지만 정말 가까운 사람만 알 수 있는, 만만치않게 시니컬하고 보수적이고 무뚝뚝한 구석도 있었다.
엄마는 항상 그녀의 어린 조카들, 그러니까 내 사촌들을 만나면 한참이나 끌어안고 놔주질 않는 버릇이 있었다. 왜 나는 그렇게 안아주지 않을까? 어린나이에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친가쪽 사촌들은 나와 나이차이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 내게도 나를 그렇게 오랫동안 끌어안고 놔주지 않는 어른들이 있어 나는 포옹에 목마른 아이로 자라지 않았다.하지만 나는 엄마의 사회적 태도와 무뚝뚝한 실제를 어릴 적부터 구분할 수 있었다.
엄마는 어린시절 나의 그림을 보고 너처럼 그리는 애는 쌔고 쌨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말들을 할 때 엄마 특유의 틱틱대는 말투가 튀어 나왔다. 나는 안다. 이 틱틱댐이란게 결코 손쉬운 반응이 아니다. 정신적인 노력이 꽤 수반되는 일이다. 너무 기뻐하지 않겠다, 너무 흥분하지 않겠다, 팔불출처럼은 굴지 않겠다는 의지가 실제로는 몹시 들떠있는 본능적인 마음과 부딪쳐 불협화음을 만드는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나는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마음을 감추고 스스로 강하게 서있으려는 노력을 할 때 유독 틱틱거렸다. 나의 가관이다는 엄마 아파서 속상해 라는 뜻이다. 그리고 엄마의 가관이다는 너가 참 고생한다이다.
나 어린시절의 젊었던 엄마는 언제나 자신감과 자기 줏대를 가지고 높은 기준을 제시했다. 엄마는 나를 높이 평가했지만 나에 대한 기대 수준을 낮추지 않았고 나에 대한 표현도 세심히 언어를 고르는 듯 객관적이었다.
"나는 네 걱정은 정말 하나도 안해."
"너는 내 딸이지만 참 특별해. 머리가 좋은 것과는 조금 달라."
"그런데 너는 예측가능한 구석도 있어."
엄마가 내게 그어왔던 깔끔한 선 Line에 대해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생각해왔다. 엄마는 늘 선에서 한 뼘 뒤로 물러나 허리를 곧세운 채,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귀부인처럼 내게 까딱 하고 인사하는 것이었다. 그런 엄마의 태도에 나는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다. 나는 엄마의 클론이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선천적으로 탑재된 내 건강하고 높은 자존감은 엄마로부터 온 것이 틀림없다. 내게 엄마는 항상 현대적이고 깊이있고 비밀스럽고 예술적인, 리스펙트 할 수 있는 여성이었다.
불행히도 엄마는 냉철한 이성을 가진 만큼 소녀처럼 쉽게 설레고 금세 사랑에 빠지는 구제할 수 없는 동심도 함께 가졌다. 그래서 엄마의 틱틱댐은 빈틈이 있고 어설프다. 틱틱댐 후에는 멋쩍기도 하고 목소리도 가늘게 떨리는 급한 화제전환이 늘 따라왔고 나는 그걸 항상 포착했으니까. 나는 사물들이 가득한 이 세계가 너무나 아름답고 좋더라! 그런데 우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것에 그리 서로 질척대지 말자! 온몸으로 외치는 엄마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존중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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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애가 왜 이렇게 게으르고~ 라는 비난을 들었던 날로 돌아가야겠다. 통화만 하고 끝내기는 너무 섭섭해서 엄마와 나는 직접 만났다. 우리는 어느 열차의 큰 창문 앞에서 만나 함께 섰다. 바깥은 깜깜한 밤이고, 엄마는 눈에 익은 갈색 오버핏 원피스를 입고 내 왼쪽에 섰다.
"엄마, 엄마는 살면서 나보다 상화에게 더 친절했었어?"
이 질문이 그렇게 중요했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엄마가 죽은 뒤 나는 해서는 안 될 일을 해버렸다. 엄마 친구들과의 카카오톡 단톡방을 훔쳐본 것이다. 가끔 타인들과 내 얘기를 하기도 했었는지 궁금했고, 물론 내 얘기도 있었다.
내용은 실망스러웠다. 내가 엄마의 주치의에게 할 질문을 빼곡하게 적은 종이를 두고 의사처럼 굴어 재미없다 라고 하는가 하면, 남동생인 상화가 살갑고 딸노릇 하지~ 와 같은 말들도 있었다. 엄마의 비난을 직접 듣는 것에는 큰 타격이 없었지만 단톡방의 대화에는 서운함이 밀려왔다. 전투에 지친 엄마에게는 어리광이나 애정어린 친절과 같은 쉼표가 정말 필요했었고 나는 그걸 잘 할 줄 몰랐다.
"걔랑은 더 살갑긴 했는데, 그래서 우리끼리만 실컷 좋았고 실질적인 행동으로 옮겨지진 않았어."
엄마가 내 질문에 대답하며 키득거렸다. 우리끼리만 실컷 좋았고~ 부분을 이야기 할 때는 양쪽 팔을 들어 오글오글 하는 손짓도 했다. 나는 엄마의 대답을 듣고 만족스럽게 깔깔거렸다. 이 꿈은 너무나 생생해서 나는 엄마를 진짜 만났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엄마가 죽은지 꼭 4개월 만이었다.
엄마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