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지고 네모 반듯한 아파트들은, 계급은 낮아도 거인신의 지위를 갖고 있다. 투박하고 을씨년한 아파트 신들의 살은, 거칠고 냉정하며 다채로운 대자연의 신들로부터 연약한 인간을 보호한다. 아파트 신들의 가슴 속은, 인간들의 세계 하나 하나를 품어 지키는 사명을 가진 만큼 단단하고 따뜻하다. 인간은 이 거인신들의 주머니에 웅크리고 누워 몇 날 몇 일이고 내키는대로 살아갈 수 있다. 그곳에는 보편적인 시간이 흐르지 않으며, 아찔한 하늘의 높이도 무자비한 땅의 깊이도 신경 쓸 필요 없는 새하얀 공간만이 있다.
아파트 신들은 멀뚱하게 서있기만 하는 까닭에 그 존재가 잊혀져 있지만, 그들에게는 저마다 개나리를 안고 있는 신성한 담벼락 골목이 있다. 이따금 볕을 쬐러 나온 노인들이 천천히 지나가며 눈여겨 볼 뿐인 고요한 길. 길인 듯 길이 아닌 길. 차들이 줄지어 잠들어 있는 길. 거기엔 한 철 수수께끼처럼 피었다 잊혀지는 흰 목련과 붉은 장미들도, 4층 높이를 거뜬히 치솟는 바싹하고 검은 나무들도 자리잡고 있다. 수줍게 드러난 이 골목을 주의 깊게 걷다 보면 이따금 차 밑에서 기어 나오는 갈색 줄무늬 새끼 고양이를 만나기도 할 것이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포복하던 고양이가 멈춰 서서 몇 초간 나를 응시할 때, 나뭇잎과 나뭇잎이 바람에 파도처럼 쓸리고 햇빛을 반사하여 반짝이기 시작하는 그 때, 고요히 시간이 멈추는 기적을 보게 될 수도 있다.
밤은 아파트 신들의 성스러움이 두드러지는 시간이다. 먼 발치에서 거인 신들을 바라 보자면, 어느새인가부터 보이지 않던 도심 하늘의 별이 실은 그들의 품에 들어차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보호받는 인간은 늦은 밤까지 이 부드러운 별빛을 제 것인 양 만끽하며 지낸다. 무척추동물처럼 드러누워서는 먹을 것을 입에 우적 대고, TV를 보고 키득거리며 상처받은 낮 시간을 잊으려 애쓴다. 그러나 개중에서도 비밀스러움과 한스러움을 간직하려는 사람들은 별빛을 아낀다. 그들은 국소적이고 은은한 조명 만을 허락한 어둠 속에 방문을 잠그고 들어가 웅크리거나 아니면 숨소리를 죽인 채 캄캄한 신들의 품 밖으로 살살 기어 나온다. 아파트 신들은 그들의 거대한 그림자를 더욱 한껏 드리워, 우리의 비밀을 지켜줄 수 있는 은밀한 장소를 만들어 준다. 망가진 놀이터라던가 담쟁이가 둘러싼 버려진 벤치가 바로 그곳이다. 어떤 중년 남자는 그곳에서 어둠 속에 깊이 잠겨있다. 또 어떤 여인은 그곳에서 오랜 연인과 조용 조용 말다툼을 하다 훌쩍이기도 한다. 별빛은 그때, 중년 남자가 서럽도록 끌어 마신 담배 한 개비 끝에, 여인이 조근대던 휴대폰 속에 내려 앉아있다.
아파트 신들은 이따금 메마른 인간들의 삶에 축복을 내리기도 한다. 엄마가 나를 부르며 소녀처럼 신나 하던 어느 날은 함박눈이 내리던 밤이었다. 우리는 쌍둥이 털모자를 쓰고, 분홍색 벙어리 장갑을 끼고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너무 늦은 밤이라 아무도 없는 아파트 골목, 사박사박한 눈이 여기저기 불 꺼진 별빛 대신 눈부신 조명이 되어주고 있었다. 신들의 사이, 짙푸르고 널찍한 하늘 공간에서 눈이 마구 쏟아져 내리고 아파트 주변은 환희와 기쁨의 침묵으로 가득했다. 침묵의 환호는 그저 조용한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신들만의 소리이다. 세상의 모든 잡소리를 덮어버리는 묵직하고 신성한 제 1의 소리이다. 엄마와 나는 이 길고도 깊숙한 침묵에 녹아 들어 금세 말을 잃고, 연신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아파트 거인신들은 위풍한 자태로 그런 우리를 내려다 본다. 인간은 이렇게, 본의 아니게 신들을 향해 경배와 제의를 지내게 된다.
아파트 신으로부터 보호받는 인간들끼리는 서로를 지정된 행성 숫자로 기억하곤 한다. 내가 702호로 불리던 시절의 어느 날, 그곳에 머무른 지 9년 만인가 처음으로 102호 아이와 말을 섞을 일이 있었다. 그 녀석은 무척이나 못나게 생긴, 그리고 목소리도 행동도 허스키했던 동네 골목대장 여자아이였다.
102호: 언니 나 알지!
'안녕' 도 아니고 '나 알지' 라고 첫 말을 건 그 녀석은 그 날 그 순간 친구들과 무언가로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고, 궁지에 몰리자 누구든 얼굴이 익숙한 어른이 필요했던 차였다. 나는 몹시 반가운 척 하며 102호의 필요를 한껏 충족시켜 주었는데, 그게 그토록 은혜로웠던 모양인지 이후로 녀석은 나를 마주칠 때마다 강아지처럼 아는 척을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오래 함께 할 수는 없었다. 102호와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섞고 나서 두 달 뒤 나와 가족들은 이사를 가게 되었던 것이다.
102호: 언니 가지 마라.
녀석이 눈물을 글썽이면서 내 옷자락을 잡았다.
나: 내가 너 요만 할 때부터 살았다.
나는 엄지손가락 한 마디를 보여주고, 102호의 머리를 두 세 번 쓰다듬고는 가던 길을 가는 수밖에 없었다. 걷다가 무슨 미련인지 뒤를 돌아보니 그 녀석이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고 있다. 열 여섯 살 차이가 나는 102호와 702호는 아파트 신들의 품에서라면 친구같은 것이 될 수 있다. 세상 쩌렁이며 놀다가 할머니의 부름에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볼 때, 퇴근하는 길 지친 발걸음으로 올라탄 엘리베이터가 7층에서 멈춰 설 때, 우리는 서로 묘한 안도감을 느꼈으리라.
아빠: 아빠는 반드시 이런 아파트를 다시 구할 것이다.
이사 가던 날 아빠는 다짐하듯 내게 말했었다. 안락한 신들의 품에 다시 들기 위해 온 식구가 악착같이 굴어야만 하는 시절이 덮쳐왔지만, 우리 식구 만을 위해 영원히 양 팔을 벌려주던 거인신은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그 후 나는 오래도록 생각했다. 그날 우리는 왜 신들의 세계로부터 쫓겨났던 것일까? 혹시라도 우리가 이토록 선한 거인신을 모독했던 적이 있었던가? 우리가 감사할 줄 모르는 삶을 살았던가? 목련을, 장미를, 고양이를, 신들이 동시에 내려다보던 그 비밀스러운 놀이터를 잠시라도 잊었던가? 시간이 멈추는 기적을 무심결에 지나쳤던가?
지독하고 몸서리쳐지는 직장을 견디며 몇 번의 병치레를 겪은 후 나는 결혼을 하기로 결심했다. 신혼여행을 가던 날, 택시 한 대가 이제 막 신랑이 된 남자와 나를 태우고, 우리를 마중 보내러 나온 아빠 엄마 곁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뒤를 돌아 뒷 좌석 창문으로 한참이나 그들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두 사람은 딸기처럼 새빨간 코를 하고 계속해서 손을 흔들었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아빠 엄마 미안해요, 나는 나만의 삶을, 나만의 신을, 나만의 담벼락 골목을 찾아야 할 것 같아요. 나만의 침묵을, 나만의 별빛을 찾아야 할 것 같아요. 아빠 엄마 미안해요,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