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현아 Apr 10. 2023

팥죽에 얽힌 기억

2023.01.31. [이상한 기분을 정리하며]

  친한 언니들과 전주에 다녀왔습니다. 그 곳에서 어느 식당에 들러 맛있는 수제비를 먹었습니다. 사실 그곳은 수제비가 유명한 곳이라기보단, 팥죽이 유명한 곳이었나봅니다. 우리 말고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은 다 팥죽을 먹고 있었거든요.

  팥죽이란 음식은 말 그대로 팥으로 죽을 쑨 음식인데, 저는 애초에 팥을 좋아하지 않고 죽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엄마가 동짓날에 팥죽을 쑤면, 그걸 누가 먹느냐고 싫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특히나 엄마가 만든 팥죽은 밥 알갱이가 둥둥 떠있는, 까만 것 사이에 보라색으로 변한 밥알이 보기 싫은 팥죽이었습니다. 엄마는 할머니가 팥죽을 좋아해서 팥죽을 쑨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팥죽을 만들어 놓으면 늘 그걸 다 비우는 것은 할머니의 몫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팥죽을 보거나, 팥죽의 냄새를 맡거나, 팥죽이라는 단어를 듣기만 해도 할머니 생각이 납니다.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할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팥죽은 저에게 늘 '할머니를 위한 억지로 만들어진 음식'이라는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아마 요즘 많은 젊은이들은 팥에 '호불호'라는 말을 붙일 것입니다. 그 중 팥에 '호'인 사람들도 팥죽에는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식당에는 연로하신 분들이 팥죽을 많이 드시고 계셨습니다. 부부로 보이는 아주머니 아저씨들, 모임에서 같이 온 할머니들, 즐거워 보이는 할아버지 일행들이 팥죽을 드시고 계셨습니다. 유별난 맛집이었는지 손님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낡은 모자를 쓰고 지저분한 옷을 입은 한 할아버지가 혼자 앉아 허겁지겁 팥죽을 입에 넣고 계신 것이 보였습니다. 혼자여서 그랬는지, 차림새가 보기에 조금 애처로워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 할아버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저는 그 할아버지를 신경쓰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할아버지를 신경쓰지 않으려고 할수록 할아버지가 신경쓰였습니다. 내 앞의 일행들과 내 몫의 수제비에만 집중하려고 했지만, 자꾸 눈꼬리에 그 할아버지가 걸렸습니다.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인 한 그릇의 팥죽, 허겁지겁 먹느라 입가에 묻은 팥죽 잔해, 주글주글한 손등, 그 처량함이 자꾸만 나를 이상한 기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그 식당에 있는 것이 나에게는 조금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 팥죽을 혼자 먹는 할아버지를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팥죽은 정말 나에게 안 좋은 기억만 주는 음식입니다. 그 맛이 달든 짜든, 죽을 때까지 팥죽을 좋아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할머니가 좋아하던 음식은 이제 와서 자꾸 나에게 속상함을 줍니다. 그것이 아직까지 할머니가 미워서인지, 이제야 할머니에게 미안해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이상한 감정이라고 정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벌써 2년이 넘게 흘렀는데도, 저는 아직도 할머니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냥 이렇게 가끔 할머니를 연상시키는 무언가를 마주하면, '아...'하고 불현듯 스쳐지나가는 장면들을 떠올리고 그냥 미묘한 상태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팥죽과 팥죽, 그리고 팥죽들 사이에서 수제비를 먹으며 그 할아버지를 쳐다보지 않으려 노력했던 저의 노력은, 전주 여행이 끝나고 지금도 이상한 기분을 줍니다.

  그냥 기분이 이상해서 일기를 씁니다.


  두 달이 넘게 임시 저장되어 있던 글.

  할머니 이야기는 그만하고 싶었는데.

작가의 이전글 엄마와 엄마의 엄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