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터에서
《빨래터에서》
학교가 일찍 끝나는 토요일에는 빨래를 한다. 1교시 시작 전부터 나는 빨래할 생각에 들떠 있다. 오늘은 날씨가 좋기 때문이다. 쨍쨍한 햇볕, 살랑이는 바람. 그 두 가지만 있으면 빨래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이 세상 속에서 나 혼자만의 진짜 세상에 들어가는 시간이다.
수업이 끝날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은 더 설레고 부풀어 오른다. 선생님의 말을 듣고는 있지만, 내 눈은 이미 빨래터의 환영을 보고 있다. 마을 중앙, 외딴섬처럼 콕 박혀 있는 빨래터. 동그랗고 깊은 우물이 빨래터 가장자리에 있었고, 중앙에는 네모나고 얕은 우물이 두 개 있었다. 깊은 우물 위에는 천막이 드리워져 있었고, 얕은 우물 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깊은 우물에서 흘러나온 물이 얕은 우물로 흘렀고, 그 앞엔 빨래하라고 땅에 박아놓은 넓고 반반한 돌이 있었다. 늘 물이 흐르는 곳이라 온 사방은 초록 이끼로 덮여 있었다. 잘못 디디면 다 빨아놓은 빨래도, 내가 입고 있는 옷도 온통 이끼색이 되는 ‘우물을 지키는 부비트랩’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이끼가 좋았다. 시멘트로 맨들하게 만든 회색빛 사람들의 빨래터보다는, 숲 속에 요정들이 노는 물놀이터 같은 그 이끼가 훨씬 좋았다.
요정의 물놀이터에 입장하기 위해선 하나의 관문을 지나야 했다. 빨래터로 향하는 좁은 길 옆에 있는 개 사육장을 지나야 만 했다. 누런 도사견 두 마리가 떠 있는 철창 속에서 컹컹 짖었다. 철창에 얼굴을 붙이고 침을 흘리며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발을 구르던 개들.
그 두려움을 이겨내야 나만의 섬, 요정의 물놀이터에 입장할 수 있었다.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여섯 발자국만 지나가면, 나는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그 환영으로 4교시의 지루한 시간을 버틴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40분 거리의 시골길을 걸어가기로 했다. 적당히 몸을 덥히고 시원한 빨래터에서 더 개운한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어떤 옷을 빨아야 할지도 다 정해두었다.
흰색 교복 셔츠, 교복 치마, 집에서 입는 옷가지들, 속옷들, 아껴 입는 외출복. 이들을 비누칠하고 빨래판에 문질러 때를 쫙 빼고, 깨끗한 물에 두 번 세 번 헹궈서 탁 털어 널면 얼마나 상쾌하고 행복할까.
아, 오빠의 청바지도 있다. 힙합 패션에 눈을 뜬 오빠는 쌀가마니 두 개를 붙인 듯한 바지를 사서 몇 달을 그것만 입었다. 이제는 빨아야 할 때가 된 듯싶다. 본인도 냄새가 나는지 방구석에 처박아뒀는데, 쥐가 새끼를 까도 모를 정도다. 혹시 버섯이 자라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웃음이 난다.
초여름의 신작로를 나 혼자 걸어간다. 이 길엔 차가 거의 없다. 아스팔트는 더 까맣고, 양옆의 논에는 초록빛 모가 자라고 있다. 나무들의 연둣빛 아기잎도 점점 짙은 초록으로 변해간다. 아기의 볼처럼 부드러운 잎을 손가락으로 살짝 만져본다. 초여름이 느껴진다.
따뜻해진 신작로를 맨발로 걸어본다. 아침까지 비가 와서 그런지 물웅덩이도 군데군데 있다. 까만 웅덩이에 반사된 하늘을 밟으며,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 같다. 아무도 없는 들판. 아무 차도 지나가지 않는다. 오직 나만의 시간이다. 빨래를 하러 가는, 아름다운 여정이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등이 축축해질 즈음, 집에 도착한다.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빨간 다라이에 빨랫감과 빨래판, 비누를 담아 허리에 꽤 차고 마을 중앙으로 내려간다.
개 사육장 앞에서 가슴이 두근거리지만, 그것이 나를 막을 수는 없다. 눈을 질끈 감고 나의 세계로 입장한다.
동네 빨래터지만 아무도 없다. 시골이라도 세탁기가 없는 집은 드물 테니. 이 빨래터를 없애지 않은 누군가에게 이름 모를 감사를 보낸다.
할머니는 얕은 우물에서 빨래를 하라 하셨지만, 나는 깊고 맑고 그늘진 깊은 우물을 택한다. 물은 끝이 보일 정도로 맑다. 안쪽에서 솟아나는 물결이 작은 소용돌이를 만든다. 손을 담근다. 차가운 물이 손을 꼭 잡아준다. "어서 와." 하는 것 같다.
파란 바가지로 물을 떠 얼굴에 끼얹는다. 한 바가지 꿀꺽꿀꺽 마신다. 입장식이 끝났다. 이제 빨래를 시작해도 된다.
옷을 물에 담그고 비누칠을 한다. 충분히 불린 뒤 빨래판에 문질러 때를 빼고, 할머니가 쓰던 빨래방망이로 흉내도 내본다. 모양도 박자도 안 맞지만 괜찮다. 내 방식대로 문지르면 된다.
고개를 들면 이끼 위로 나비가 날고, 이름 모를 벌레도 날아다닌다. 달팽이도 지나간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요정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외롭지도 않고, 심심하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다.
오빠의 청바지만은 조금 힘들다. 파란 물이 아무리 빨아도 빠지지 않는 뭐 이런 옷이 다 있냐 하던 할머니 말이 떠오른다. 나도 힘을 써야 한다. 이마에 땀이 맺히면, 우물물 한 바가지를 들이키며 다시 힘을 낸다.
하얀 비눗물이 사라질 때까지 문지르고, 손이 쪼글쪼글해질 때쯤 빨래가 끝난다. 내가 다녀간 흔적이 남지 않게, 바가지로 물을 뿌려 비눗물을 치운다. 이끼에 미끄러지지 않게 더 신중하게 발을 옮긴다.
세 배쯤 무거워진 빨래 다라이를 옆구리에 끼고 다시 좁은 길로 향한다. 가장 멋진 일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집에 도착하면 마당을 가로지르는 장대를 낮추고 빨랫줄에 옷들을 줄지어 널어준다. 빨랫줄에도 이끼가 끼어 있으니 집게로 단단히 고정시킨다. 줄지어 널고 나서 장대를 다시 세운다. 균형을 맞추며 조심스럽게.
파란 하늘에 내 깃발처럼 펄럭이는 빨래들. 옷에서는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며 흙바닥에 작은 그림을 그린다.
이제 됐다. 마루에 누워 그 장면을 바라본다. 펄럭이는 빨래를 보며, 나부끼는 바람을 내 볼로 느낀다. 눈을 감는다.
따뜻한 햇볕이 불은 손가락과 발가락을 말려준다. 자장가처럼 들려오는 펄럭이는 소리.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