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사 암석군
나의 의지나 선택과 무관하게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쌓이는 게 나이다. 어쩌다 보니 직장에서 최연장자로, 평균 연령을 높이는 주범이 되었다. 100세 시대 초고령사회가 맞다면 50대는 젊은이가 분명한데, 현실 노동시장에서 50대는 은퇴를 앞둔 늙은이일 뿐이다.
100여 년 만에 내린 폭설로 하루 늦게 데친에 도착한 분과 눈인사를 나눴는데, #케이하우스 케이님보다 선배다. 평소 농담 삼아 내일모레면 60이라고 얘기했는데 이미 60 넘은 선배 2명과 한동안 같이 지낸다. 막내니까, 후배니까 귀염 듬뿍 받아야지!
8명은 넉넉하게 앉을 수 있는 공용부엌에서 어제 저녁에 빌라 슈퍼에서 산 빵, 치즈, 햄, 야채 등으로 아침식사 중에 케이님이 오늘 밤에 드레스덴필하모니 공연 보러 가니까 데친 근처 둘러보는 게 어떠냐, 새로 합류한 큰 누님도 ChatGPT가 Tisa의 바위를 추천해 줬다기에 반드시 어딜 봐야 한다고 정한데 없이 여행 중인 나는 노 프라블럼. 한국에서 도시 민박을 하는 큰 누님의 전직은 여행 가이드, 어쩌다 보니 전현직 여행업자겸 숙박업자 3명이 한 집에 머물게 되었다. 인연은 기다리지 않아도 불쑥 찾아온다.
데친역 Decin hl.n 앞에서 버스 -Libouchec, ObÚ에서 버스 환승-Tisa 도착. 버스 정류장 근처 동네 뒷산 등산로에 티사의 사암군 설명과 과거 사진이 있는 안내문으로 봐선 동네에선 나름 유명한갑다.
뒷산 약수터 보다 짧은 거리를 오르자 기암괴석이 두둥~ 며칠 전 천국의 문도 그렇고 이 지역에 이런 류의 사암층 기암괴석이 많은 걸 보니 수십, 수백만 년 전 지각변동으로 바다가 융기했고, 또 그만큼의 세월 동안 비바람에 깎이고 파여서 현재가 되었나 보다. 현재는 과거의 축적이니 과거 없는 현재는 있을 수 없다.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짓을 알고 있다.
오호~ 입장료 없는 동네 뒷산에 이런 장관이라니, 전직 여행가이드로 유명하다는 경관을 두루 다녔던 큰 누님도 감탄을 금치 못한다.
자욱한 산안개가 낀 기암괴석 사이를 걷는데, 어느 순간 경공술을 펼치는 무사가 바위 위에서 내 앞을 막아서는 무협영화의 한 장면이, 어디가 어딘지 구분할 수 없는 산안개가 자욱한 미로 속에서 도망자가 된 나는 추격자를 피해 힘겹게 헤매는 추격씬이 전개될 법, 하다.
-어머나~ 대단하다
-그러게요. 그냥저냥한 동네 뒷산인 줄 알았더니… 굉장하네요
-지피티 선생이 여길 추천 해주더라고요. 괜찮다고
이때까지만 해도 지 선생의 능력을 몰랐고 무시했다.
-천국의 문은 멀리 떨어져서 바라봐야 하는 가까이할 수 없는 대상이라면 여긴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바로 옆에 있는 가까운 존재랄까?
-많이 달라요?
-네. 근데 여긴 왜 안유명할까요? 충분한데
-이름이 중요하잖아요. 작명이 필요해. 티사의 암석, 약해. 천국의 문 가고 싶잖아
-한국인들은 MSG를 필요로 하는 듯. 네임드에 환장이죠. 보헤미아의 무릉도원, 보헤미아의 장가계 뭐 이런 이름을 붙여야 하나?
-ㅎㅎ
기암괴석 미로 속을 헤매다 정상부로 올라가니 깎아지른 절벽 밑으로 마을이 있고 구릉지대의 평원이 쫘악 펼쳐진다. 독일과 접경지역이긴 해도 엄연히 체코 땅인데 자국민의 안전을 문자로만 걱정하는 대한민국 외교부는 독일 입국시 주의사항 문자를 보내는 쓸데없는 오지랖으로 국민 세금을 반복해서 탕진 중이다.
비가 내리나 싶더니 산 아래로 내려오자 눈이 되었다. 몇 년째 부산에 살다 보니 눈 구경할 일이 없는데 올해 첫눈을 체코에서 만난다. 펄펄~ 눈이 옵니다~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누님, 커피라도 하까요?
-그래요
레스토랑 간판이 보여서 갔더니 문 닫았고, 바로 옆에 구멍가게가 있어 기웃대는데, 가게 여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체코어만 했던 관계로 대화 내용은 전부 짐작과 추측이다.
-(손짓으로) 들어와
-(역시 손짓으로) 뭐 팔긴 해?
-(또 손짓으로) 들어와
그렇게 들어선 가게 안은 마트에선 구경할 수 없는 크기가 제각각인 완전 핸드메이드 야채와 과일이 한 사람이 다 사도 될 정도로 적은 양이 놓여있고, 미처 치우지 못한 인쇄물이 널브러진 테이블 2개가 전부다. 이렇게 기상이변이 잦은데 언제 올지 모르는 손님 때문에 기름을 빵빵하게 때지 않은 실내는 찬바람 불지 않는 실외다.
-뭐 마실래?
-뭐가 되는데? 메뉴판 없나?
-(역시 말로만) 라떼? 카푸치노?(오~ 알아들은 유일한 단어)
-으음… 라떼 하나, 카푸치노 하나
진짜 미지근한 라떼를 홀짝이는데 도로공사 작업복 차림의 남자 4명이 좁은 가게 안에 들어오고, 주인과 이런저런 말을 나누는데,
-누님, 저 사람들 음식 시키나 봐요
-어떻게 알아요?
-제가 언어가 딸리는데, 먹고는 살아야 하니 온 감각을 총동원한 눈치와 감이죠
-근데 여기 조리할 데가 없는데
-저 안쪽… 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나왔고 라테는 카푸치노 식당의 정체는 임시 함바집으로 밝혀졌다. 아직 감이 죽지 않았구나. 다행이다. 뿌듯하다. 50여 년 이렇게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쭈욱 이렇게 살자.
가게를 나서는데 펑펑 함박눈이 내린다. 쏟아진다. 첫눈 내리는 날 만나자며 손가락 걸고 약속했던, 약속은 사라져도 첫눈은 내린다. 내 삶을 응원하는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