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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테츠 Zatec, 맥주와 홉

by 딜리버 리

평소 거의 걷지 않는 포병스런 사람도 여행지에서 대중교통으로 이동하고, 걷기의 연속인 보병으로 많이 걸었으니 몸이 지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체류형 여행자에게 대중교통 접근성과 이동의 편리성은 여행지 숙소 선택에서 우선순위 중의 하나다.


오늘로 3일 차, 데친역 앞 #케이하우스, 조건을 충분히 만족시키고 있다. 기차역 바로 앞이라(역 나서면 간판이 바로 보이는 진정한 역세권!) 기차 이용은 물론이고 시내외 버스들도 데친역 앞이 정류장이라 접근성과 이동의 편리성은 최고다. 그러니 장소의 이점을 마음껏 누리자~ 여기저기 돌아다니자~


여행업자일 때는 어쩔 수 없이 일정표를 짰지만, 개인 여행은 시간대별 일정에 쫓길 일도 없고, 싫어서 당일 상태와 여건에 따라 어딜 갈지 정하는 편이다. 오늘 후보군은 2차 대전 당시 유대인 강제수용소로 사용된 #테레진, 인근의 소도시 #리트메로치, 홉과 맥주의 성지라는 #자테츠, 보헤미아의 맨체스터로 불렸다는 #리베레츠.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많지만 여행기간은 정해져 있으니 이리저리 재본다. 그래봐야 내가 있는 곳을 떠나는 게 여행의 시작이니 어디 갈지 고민될 땐 출발 시간대가 빠른 걸 택한다. 그래서 자테츠!


데친-모스트(환승)-자테츠, 어라~ 데친 남쪽 방향으로 이동할 때 대부분 거치는 우스티 나벰에서 갈아타는 게 아닌 기차다. 보헤미아 동북에서 서북으로 이동하니 저 멀리 지평선 쪽으로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 산들과 드넓은 평원이 펼쳐지며 풍광이 다르다.


최상급 홉을 재배하는 지역을 자랑이라도 하듯 거무스런 흙색깔로 토양 상태가 얼마나 좋은 지를 뽐낸다. 곧 자테츠 도착인데 자테츠역과 모르는 단어가 뒤에 붙는 자테츠역 두 군데다. 어디서 내리지? 그래도 정통은 다른 설명이 필요 없지. 자테츠는 자테츠! 내렸는데 역사는 공사 중이라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고, 역무원도 찾을 수 없다. 네임드에 속지 말자. 교회 첨탑과 성으로 보이는 건물이 아득하다.


드디어 어제에 이어 걷는 복이 돌아왔다. 하루 2만 보 이상은 기본으로 걷는 택배족이 걷기를 두려워하다니, 맨 몸으로 평지를 걷는 게 어디야,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드넓은 평원이라 바람을 막아주는 게 없는 데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세찬 바람에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려도 연신 콧물이 흐르고, 움츠리게 된다. 제 아무리 뛰어난 능력자라도 날씨를 바꿀 순 없으니 날씨탓 해봐야 소용없다. 을씨년스러운 날씨를 빨리 인정하고 적응해야 한다. 여행자는 길을 탓하지 않는 법이다.

어찌어찌 구도심까지 콧물 닦아가며 왔는데, 웬걸?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았다. 홉 박물관을 찾았는데 자테츠 홉과는 상관없을 세계 각국 맥주를 전시해 놓고(한국 맥주는 카스 1종뿐) 병맥을 파는 뮤지엄스러운가게다. 공식 뮤지엄은 어디야 물었더니 겨울은 비수기라 빅 뮤지엄은 문을 닫았단다.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최상급 홉으로 만든 맥주 마시는 게 자테츠를 찾은 목적이었으니 근처 식당에서 Samec 11도와 ARANKA 흑맥주에 굴라쉬를 시켰다. 삶은 소고기와 버섯에 흥건한 소스와 안남미가 있는 굴라쉬는 가격대비 별로, Samec 11도는 동네 맥주인 브레즈낙과 비슷하지만 좀 더 센 느낌이고, 흑맥주를 생맥으로 먹은 적이 거의 없는데 기네스의 지나치게 밀키함과는 다른 와일드함과 묵직함이 좋다.


여기까지 오느라 들인 시간과 돈을 감안하면 겨울철에 자테츠는 별로다. 9월에 축제가 열리던데 보졸레 누보처럼 갓수확한 최상급 홉으로 만든 맥주가 나오나? 그때는 더 많은 맥주가 선보이려나? 아무리 다양하고 맛난 맥주가 있어도 배 불러서 많이 먹지도 못할 텐데, 설혹 많이 마실 수 있으면 취해서 맛 구분도 안될 텐데, 쩝~ 그냥 동네 술집에서 이것저것 마시는 게 낫지 않을까? 필스너 우르켈, 코젤 빼고.


여행은 현장성이니 와보기 전까진 제대로 실망할 수 없는 게, 알 수 없는 게 여행이다.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듯 여행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듯 맥주와 홉의 성지가 그저 그런 작은 마을이었어도 구름과 발전소 수증기가 뒤엉킨 디스토피아스런 풍경은 건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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