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이 있는 여행이면 당연히 함께 다니는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듯, 언제부턴가 여행 방식에 변화가 찾아왔다. 정확한 계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는 단순히 여행 방식의 변화라기보다는 삶의 방식이 변한 것이 아닐까 싶다.
새벽 산책 중인 나와 침대 속의 그, 바닷물 속의 나와 파라솔 밑의 그, 미술관을 헤매는 나와 백화점에 머무는 그. 그날 그날의 감정과 몸 상태에 따라,
따로 또 같이
다니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각자의 취향을 인정하면서, 떨어져 있는 동안 내 기분과 감정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물론 바로 옆에 얘기를 나눌 상대가 없고, “같이 있었으면 더 재미있을 텐데, 같이 봤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은 여전하다. 상대도 같은 아쉬움이 있을 꺼란건 그저 나만의 생각일 뿐이니까.
패키지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낯선 곳에서 혼자 있는 시간을 불안하고 두려워한다. 그래서 모국어를 사용하는 동행과 함께 다니며 안전함과 익숙함을 찾는다. 낯선 곳은 그저 눈으로만 담아간다. 지금은 여행지 정보를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어서 영향력이 현저히 줄었지만 투어가이드의 말이라면 덮어놓고 사실로 믿던 시절이 있었다. 그 가이드도 단편적 여행지 정보를 달달 외우고, 자신의 주관적 견해를 더했을 뿐인데, 아마도 익숙한 모국어의 힘이 아니었을까 싶다.
체코와 독일의 국경 도시 데친에 있는 케이하우스에서 혼자 돌아다니기 이틀째, 몇 십년만의 폭설로 하루 늦게 여행사 투어가이드 출신의 H 누님이 도착했다. 케이하우스 공동주방에서 주인장 K님과 H 누님과 인사를 나누고, 이번 여행은 특별한 목적이나 일정 없이, 당일 아침의 기분과 감정에 따라 보헤미아 북쪽과 독일 작센의 소도시들을 다닐 예정이라니, H누님도 소도시를 돌아다니려 한다고 하자 K님이,
-둘이 같이 다니면 되겠네요
-저는 상관없지만, 진짜 무계획에 즉흥적이라 H누님이 불편하실텐데…(살짝 경계심도 있었다)
-저는 괜찮아요
-누님, 연세가?
-58년생이에요
-오오~ 말로만 듣던 58년생을 실물로 영접하다니…
어쩌다보니 직장에서 최고령인데다 어디 가서 나이로 밀린 일이 없었는데, 한국인 단 세 명만 머무는 이 도시에서 막내가 되었다. ‘귀염둥이 막내’로 이쁨 받아야지!
-저는 마음에 안 들거나 불편한 게 있으면 바로 말씀드릴 테니, 누님도 힘들거나 불편하신 점이 있으면 꼭 이야기해 주세요
-그래요, 그렇게 해요.
#데친. 작년 8월, 이곳에 함께 오려고 했던 동행과 이별하면서 마음에서 지웠던 여행지였다. 아직 가보지 않은 곳도 많고, 가보고 싶은 곳도 부지기수인데 굳이 아픔과 슬픔이 떠오를 곳에 올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지웠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매번 여행을 준비할 때마다 데친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남을 것 같아, 혼자라도 다녀와서 털어내고 싶었다.
밤이 되었지만 내일 일정이 없어도 걱정 없이 잘 자는 오늘만 사는 50대와 내일의 일정을 위해 오늘 아침부터 계획을 세워야 마음이 편한 60대가 우연찮게 동행하게 되었다. 아마도 이곳은 동행과 함께 와야 할 인연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을 낯선 사람과 동행으로 시작하게 되었으니… 어떤 결말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