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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배웅을 받은 아들

아구찜

by 딜리버 리

-내일 쌀국수 먹을까?

-쌀국수, 좋지

-그럼 박물관 들렀다 먹으러 가자

-박물관, 재밌는 거 하나?

-갑 오브 갑이라고 갑옷 특별전 한대

-갑옷, 군인이 입는 거?

-응. 전에 인디언 특별전처럼 이번엔 갑옷이래


박물관에 왔는데, 갑 오브 갑 전시는 며칠 전에 끝났다. 상설 전시는 이미 여러 번 봤고, 에헤~ 어쩌나 싶은데 조선시대 신윤복, 김홍도, 겸재 정선의 그림을 미디어아트로 재현한 전시가 있다. 겸재 정선의 폭포에서 물이 떨어지고, 신윤복의 그림 속 인물은 살아있고, 김홍도의 대나무 잎은 흔들리고 눈이 쌓인다. 전시는 재미난데 작품수가 적어서 30분도 안 걸렸다.


-점심 먹으러 갈까?

-그러자

-쌈밥집, 소고기국밥집은 바로 옆이고, 쌀국수는 경성대쪽으로 가야 하고…

-버스에서 보니까 아구찜도 있던데

-아구찜, 오~ 먹은 지 오래됐다

그렇게 근처 아구찜집에서 순한 맛 아구찜 작은 걸 시켰다. 엄마는 밥, 난 사리 추가.

-예전에 TV 예능에 나온 외국인이 한국 음식 중에 거짓말이 제일 심한 게 아구찜이래

-왜?

-콩나물뿐인데 콩나물찜이라 해야지 왜 아구찜이라 하냐고

-호호~ 맞는 말 했네

-근데 이 집은 아구찜이라 해도 되겠네. 콩나물이 안 많네

-응, 안 맵고 맛도 괜찮네

-인천에도 아구찜집 많거든. 거기서 아구찜 먹고 깜짝 놀랐어

-왜? 엄청 맵나? 맛이 달라?

-아니, 생아구 쓰는 건 마찬가진데 찜 다 먹으면 밥을 볶아. 맨밥을 안 먹어.

-어디에?

-찜에

-왜?

-몰라. 갸들은 삼겹살도 그렇고 김가루 뿌리고 볶아 먹는 걸 좋아하나 봐. 어쨌든 밥 한 그릇 뚝딱, 엄마 잘 드시니까 좋네.

-응. 맛있게 잘 먹었어

-나 5월 말에 9일 쉬거든.

-9일이나, 그렇게 쉬어도 되나?

-응, 엄마랑 여행 가려고 작년 성탄절, 설날, 어린이날 대체휴무 안 쓰고 차곡차곡 모았지.

-아이구~ 말라고 그랬노? 일도 힘든데 쉴 수 있을 때 쉬어야지

-어디 갈까? 가까운 일본 갔다 오자.

-아직은 안돼. 몸이 영 불편해서

-그럼 경주는? 부산서 1시간이면 가잖아.

-(단호하게 끊어줘야겠다 싶은 지) 안돼. 못 가. 어디 가는 게 아직은 겁이 나

-(풀이 죽어) 앞으로 기회가 더 없을낀데…

-이건 내가 살게

-갑자기? 내가 엄마보다 더 버는데?

-내가 니보다 나이 많잖아, 니 엄마잖아

-에이~ 미리 말하지. 제일 비싼 거 시키게

-다음에 그렇게 해. 오늘 바쁘나?

-아니, 왜?

-산책 같이 할 수 있나 해서

-당연하지. 엄마랑 산책하면서 얘기하는 거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럼 UN 공원 산책하자

엄마 건강으로 여행을 못 간다니 풀이 죽은 아들 표정이 마음에 걸리셨을 테고, 산책하신 거 안다. 여행 가자 더 조르면 마지못해 가시긴 하겠지만 내 욕심인 것도 안다. 어쩌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 시간은 누구도 어쩌지 못한다. 그러게 평소에 잘했어야지. 여행경비로 엄마랑 맛난 거 먹어야겠다.


-대연동 친구 있을 땐 UN공원 종종 왔었는데

-참, 대연동 아줌마는 아직 서울 계셔?

-응, 서울서 손주 봐주고 있어. 전화만 자주 해

-아줌마 아는 사람도 없을 건데, 우짜노?

-딸 사정이 있으니 우짜지도 못하지. 전화하면 갸는 친구야 보고 싶다 이러고, 나도 친구야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제 이러지

-ㅎㅎ,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을 친구가 있는 건 엄청난 복이고 행운인 거 같아

-아들딸한테 못할 얘기도 친구한텐 하지. 그 친구가 대연동 살 땐 언제든 볼 수 있어서 좋았지. 뭔 말을 해도 들어주고, 내 편이 돼서 고개 끄덕이고, 칼국수에 김밥 먹어도 얼마나 행복한데…

-대연동 아줌마가 빨리 부산으로 오시야 울 엄마가 짱짱해지실텐데… 그동안은 나라도 자주 올게

-그래, 여기는 사람이 안 많아서 친구도 좋아했어

-도심 한 복판에 이런 공원이 있는 건 이 동네 사람들 복이지. 아닌가? 아파트를 못 지어서 싫어할라나?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네. 그래도 UN 남구라 할 정도로 여기를 엄청 내세워

-아쉬운 건 한국전쟁 때 도움받고 그때 전사자묘역도 있는 지자체에서 말로만 UN 내세우지 말고, 이주민과 난민에 대한 환대와 포용을 위한 정책과 제도를 만들고 실행하면 좋을 텐데… 못 사는 것들 몰려온다고 남구 아파트 주민들이 싫어할라나? ㅎㅎ

-울 아들이 피부색, 출신지로 구분하고 차별하는 게 싫어하지

-엄마도 그런 사람들 별로라며?

-응, 별로야

갑자기 빗방울이 굵어져서 들고 있던 시커먼 우산을 펼치려고 하자, 이쁜 우산 쓸 거라며 노오란 우산을 꺼내는 내일모레 80인 소녀가, 손을 흔들며 아들을 배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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