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국수 대신 쫄면, 파스타
지난번에 이어 두 번째 중이염이다. 중이염이 심하면 어떤 증상인지 모르지만 현재까지는 약간의 먹먹함과 쓱쓱 거리는 듯한 이명이 신경 쓰이긴 해도 일상생활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다음 다이빙 일정이 잡히지 않아서 당분간 물에 들어갈 일이 없다. 의사는 다이빙과 안 맞는 거 아니냐는데 몸이 견딜만하니 열길 물속 탐사는 계속될 수밖에. 어서 빨리 낫자!
휴무일에 집에서 TV 또는 스마트폰을 만지작대는 게 싫어서 오랜만에 극장 가자, 모퉁이극장행 버스를 탔다. 극장 근처 국제시장 안에 페친이 알려준 '나다’에서 파스타 먹으려든 계획은 가격 때문에 접고(이태리 파스타, 베트남 쌀국수, 한국 냉면 등 아주 특별하고 비싼 토핑 재료가 들어가지 않음에도 면요리가 만원 넘는 건 사회적 재앙이라 생각한다), 비 오는 날은 뜨뜻한 국물이지 싶어 인근에 있는 칼국수집으로.
다들 칼국수를 맛있게 먹고 있는데 메뉴판에 적힌 '쫄면"에 꽂혔다. 언제 처음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국민학교 5학년말에 부산으로 이사 온 이후인 건 확실하다. 그전에 먹어본 면요리는 라면과 국수가 전부다. 냉면, 밀면, 파스타, 라면, 국수, 미고렝 심지어 당면에 수면(하이개그를 표방한 아재개그)까지 면요리는 다 좋아하고(그래서 여기저기 돌아다닐 때도 음식 때문에 불편하지 않았다), 그 면요리들을 처음 맛봤을 때의 놀라움이 있지만 비빔면의 일종일 뿐인 쫄면은 차원이 다른 ‘신세계’를 선사했다. 돌이켜보면 쫄면의 맛 자체보다는 서부경남 산골 출신으로 면요리라곤 라면과 국수만 먹어봤고, 밥 먹고 돌아서면 배고픈 10대의 경험이니 어쩌면 감정이입이 과다했을 수 있겠다 싶다. 어쨌든 나의 면세계는 '쫄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가족 외식이라곤 짜장면 먹는 게 유일했던, 그걸로 행복했던 놈이 친구 가족 외식에 꼽사리로 껴서 돈가스를 처음 먹었을 때의 희열과 비교될 수 있으려나?
초장과 별반 다르지 않을 뻐얼건 새콤달콤 양념과 양배추, 상추 토핑에 비릿한 멸치냄새가 풍기는 진한 멸치국물, 딱 그뿐인데 쫄면은 언제 먹어도 맛있다. 곱빼기가 8천 원이다. 위생상태를 각별히 여기는 사람은 오지 말지어다. 테이블 바로 옆 완전 오픈형 주방에서 조리하는데, 조리 환경이 그리 위생적이지 않다. 그러고 보면 포장마차에서 떡볶이, 순대를 먹을 땐 따지지 않으면서 유독 식당의 위생상태 여부는 품평한다.
영화 상영까지 2시간 가까이 남았는데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다큐멘터리라 썩 내키지 않던 차에 가방 안에 손턴 와일더의 소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가 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책, 좋은 궁합이라며 오래 앉아있어도 눈치 볼 일이 없는 프랜차이즈 커피집으로 갔다. 50 페이지 정도 읽었나? 어느새 의자에 앉은 채로 30분 이상을 잤다. 코나 안 골았으면 다행이다. 휴무일에 하루 종일 독서했더니 몸무게가 빠졌다며 그만큼 머리 쓰는 게 칼로리 소모가 많다고 의료업 페친이 농담 삼아 얘기하던데, 독서만큼 좋은 수면제가 없는 나는 애초에 살 빼기 글렀다 싶다.
집에 돌아와 커피콩 볶고, 청소기 돌리고, 스팀 물걸레질 하고 나니, 배가 고프다. 점심에 못 먹은 파스타, 먹자. 프라이팬에 소금과 올리브오일 약간 뿌리고 파스타면 6분 정도 삶은 뒤 냉동마늘+토마토소스+스팸+생토마토 잘라 넣고 1분 정도 삶아서 올리브오일 듬뿍 뿌리고, 무아스파탐 막걸리를 곁들인다. 오호호~ 막걸리와 파스타, 의외로 괜찮은 조합이다. 그렇게 점심에 못 먹은 파스타를 저녁에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