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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밥을 챙겨줬던 사람의 축사

by 딜리버 리
이모가 잔소리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정말로 걱정되는 것이 많아서 그래요.

https://n.news.naver.com/article/032/0003379433

입학식, 졸업식 및 각종 기념식, 회식 등을 합치면 지금껏 수십, 수백 번의 '식'에 동원되었다. 그때마다 크든 작든 돈과 권력을 쥔(심지어 나이가 많은) 인사들의 훈계질을 지루하게 들어야 했다. 매번 저 자리에서 일장연설하는 인물들이 저 사람들이었고, 한 번도 의구심을 가지지 않았다. 당연했다. 내가 어떤 이념을 쫒든 의식은 사회 환경의 영향을 받고, 사회가 가진 한계 속에 머물 가능성이 높다.


4번의 졸업식을 거쳤고 그때마다 학교 다니는 내내 들려준 것으로 모자라다 싶었는지 학교 끝내는 날까지 훈계질을 해댔다. 그들이 했던 말 중에 한 단어라도 기억에 남는 건 없다.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 각종 '식'의 일장연설이 없어지지 않는 건 그걸 하고 싶은 인간들 때문 아닌가? 결혼식 알바도 있다던데, 누구도 듣지 않는 일장연설을 하고 싶으면 자기 돈 주고 알바를 쓰면 될 듯하다.


어쨌든 주 5일 내내 수업에서 빠지지 않은 과목이 있을 수 있지만 학교와 교사 사정으로 빠질 때도 있다. 하지만 단 하루도 빠지지 않는 게 급식이다. 그만큼 학생들에게 밀접하고 필수적이다. 국영수 공부는 못해도 살아갈 수 있지만 밥을 먹지 않곤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그 일을 담당하는 한국의 급식 노동자는 교사보다 낮은 임금과 처우를 받고 있다. 몇 년을, 몇 십 년을 일하든. 사회 구성원들도 당연시한다. 아마도 급식 노동자 본인조차도.


구내식당 급식 노동자가 대학교 졸업식 축사를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이대에 비해 생각의 폭이 자유롭다 여겼건만 내 생각의 한계가 부끄럽고, 한편으론 저렇게 할 수 있는 사회가 부럽다. 모든 노동은 육체적 노동을 기반으로 함에도 굳이 '사무직'이란 이름 붙여서 노동을 차별하며 육체적 노동을 폄하한다. 노동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는 노동에 대한 차별이 깔려있고, 차별은 약한 고리를 끊임없이 찾으므로 결국 누구도 존중받을 수 없게 된다. 한국은 노동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위험수위에 있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필수노동임에도 자신의 일이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 노동의 소외는 일어난다. 노동의 소외는 외로움을 동반한단다. 외로움이 깊어지고 흔해지면 사회의 불안도는 높아진다.


한국의 급식 노동자가 졸업식 축사를 할 수 있을까? 누구 말처럼 대학만 나왔어도 안 할 일인데, 내 자식은 이 일을 하면 안 된다며 자신의 노동을 하찮게 여기는 건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망해가는듯 하다. 노동, 존중받아 마땅함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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