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서울에 직장을 구했고, 나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근 10년을 넘게 볼 기회가 없었고, 자연스레 멀어졌다. 10여 년 전, 지리산 자락에 살 때 느닷없이 연락이 왔다.
-어, 얼마만이고?
-잘 지내제?
-나야 잘 지내지. 우짠 일이고?
-마침 니 사는데 근처에 출장 가는데, 저녁에 소주 한 잔 하자
-그래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과 설렘이 전부였던 젊디 젊은 20대는 어느덧 머리색이 희끗희끗한 중년이 되었다. 그 뒤로 일이 년에 한 번씩 만나 안부와 고민을 나눴다. 먹고사는 방식과 사는 동네가 달라서 어쩌다 한 번씩 만날 수밖에 없지만,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으며 웃고 우는 사이가 되었다. "나이 들수록 나를 포장할 필요가 없는, 내 과거를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 그립다"라는 그의 말처럼.
배송 마치고 퇴근 기다리는데, 카톡으로 느닷없이 부고장이 왔다. 집이 가까워 자주 들락거리고 술도 자주 마셨던 동기다. 지방 사립대 학벌에 성적도 좋지 않은 주제에 졸업을 앞둔 아들이 술 먹고 밤늦게 들어오는 것도 탐탁지 않은데, 친구까지 같이 오니 얼마나 걱정이 되셨을까? 너희 우짤라고 몰리 댕기냐는 이런저런 지청구를 하시면서도 꼭 밥은 챙겨주셨다. 아주머니 연배가 엄마랑 엇비슷하셨는데, 남 일 같지 않아 부고장을 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집에 와서 본 부고장에서 눈에 띈 건 51세, 어머니가 아니라 아내였다. 어~ 아내가 지병이 있단 소리를 못 들었는데, 큰 사고를 당했나? 카톡에 뭔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있는데, 두어 시간 지났나? 동기에게 전화가 왔다.
-경황없을 건데 전화는 와 했노?
-그래도 니가 결혼식 사회를 봐줬는데, 연락 못한 게 걸려서… 그 사람도 한 번씩 니 안부 묻곤 했는데…
-정신없을 낀데
-이래 황망하게 가니까, 사는기 뭔가 싶고 그렇네
-기운 내야지
-감기 기운이 몇 달 동안 안 떨어져서 종합병원 갔더니 급성 백혈병이라고… 손도 못썼다
-아이고~
-장례 끝내고 정리되면 소주나 한 잔 하자
-그래
-이래저래 별 말 안 해서 고맙다
-마음 단디 무라
-어
그렇게 질기다는 목숨이지만 이렇게 황망하게 스러지기도 한다. 마침, 서울 장기 출장을 지원받기에 신청했다. 서울 도착해서 전화했다.
-내일 시간 되나?
-니 어딘데?
-서울
-뭔 일 있나?
-뭔 일은 니가 있다 아이가. 소주 마시려고 왔지
배송할 때는 푹푹 찌는 더위에 미치겠더니 퇴근하고 나니 미친 듯이 비가 퍼붓는다. 남부터미널 앞에서 만나 눈에 띄는 통닭집으로 갔다. 말없이 500cc를 두어 잔 비우고,
-서울은 어쩐 일이고?
-서울 출장받기에 지원했지
-고맙다
-고맙긴... 괘안나?
-모르겠다. 아직도 실감되지 않는데. 아들내미 챙기다 보면 확 다가오고...
-아(들)는 괘안나?
-갸가 딴 아덜하고 다르잖아. 그래도 우짜겠노? 이제부턴 엄마가 못 챙겨주니까 지 인생 살아야지
-니는?
-병원에 있는 일주일 동안 속상했던 마음, 좋았던 추억, 고마움, 미안함을 두서없이 얘기했거든. 그러고 보니 우리가 맨날 대화한 소재가 돈, 자식 얘기뿐이었더라. 그 사람이 당신과 이런 대화를 나눈 일주일이 마지막 기억이라 다행이라는데 참 미안하대. 그 사람이 영화와 전시 보고 얘기하고, 여행 좋아했는데, 산책하면서 얘기하는 거 좋아했는데...
-우리는 어쩌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걸 놓치고 사는 걸까?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가 있잖아. 먹고사는 이유를 잊고 사는 것 같아
-돌이킬 수 없는 시점에 그걸 깨닫고, 참 어리석지
-참, 니 우산 있나?
-웬 우산?
거래처에서 기념품으로 만든 걸 챙겨 온 그가 준 우산, 침대 위에 덩그러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