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만난 세부인
여행 가기 전에 현지 정보(문학, 예술, 정치, 역사 등)를 책으로 먼저 읽는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건 잘 모르겠고 내가 머물 낯선 곳에 대한 궁금함 때문이다. 뭘 알아야 묻기라도 할 수 있으니. 단골 도서관에서 '필리핀' 검색했더니 가이드북 한 권만 달랑. 혹시나 싶어 '동남아'로 검색하니 <도시로 보는 동남아시아사 2>가 뜨기에 목차를 봤더니 세부가 나온다. 지금은 휴양지, 해양 액티비티의 천국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때는 '남부의 여왕'이란 별칭이 있을 정도로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통로의 요지로, 해상교역의 중심지였단다. 이게 다다. 낯선 곳을 알기엔 턱없이 부족하고 간략한 정보다. 필리핀 인구가 1억 1천만명을 넘고, 증가율도 높은데 그저 못사는 동남아국가로만 안다. 돈으로 이웃을 무시하는 동방예의지국 아닌가?
택시, 숙소, 식당 등의 여행정보를 찾다가 세부 100배 즐기기 네이버 카페를 알게 됐다. SNS가 아닌 매체는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는 듯 하지만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공간은 여전히 살아있고 사람들로 북적댄다. The Buggles가 MTV에서 <Video killed Radio Star>를 부른 게 40여 년이 지났어도 Radio가 건재하듯 말이다.
이 카페에서 세부를 다녀온 분이 점잖고 친절한데 안전 운전해서 편하게 다녔다며 강력 추천한 택시기사, Cris를 알게 됐다. 와츠앱, 텔레그램 아닌 카톡으로 외국인과 대화하다니... 내가 아는 수준보다 빠르게 세상은 연결된다. 큐알코드로 친구 추가하고, 채팅창에 번역기능이 있는 것을 카톡 사용하고 처음 알았다.
3월 1일 08:05, 카톡으로 상호 인사를 나누고 3월 23일 막탄공항에서 모알보알 픽업가능하냐, 얼마냐 물으니 가능하다며 2,500페소란다. 구글링으로 검색한 결과 예상금액이었지만 더 싸게 간 사람의 후기를 본 지라 2,000페소에 해줄 수 있냐니까 안된다며 아주 빠른 아침에 도착하는데 힘든 시간대라고 하기에 가격 흥정엔 밀당이 필요하다 싶어 동료와 얘기하고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다.
3월 10일 18:17, 밀당의 시간이 충분히 지났다 싶어 카톡을 했다. 지난번에 연락했는데 기억하냐니까, 당연 기억한다, 도착은 그대론데 막탄공항-오슬롭-투말록 폭포-모알보알로 동선이 바뀌었는데 얼마냐니까 오슬롭 고래상어 투어, 투말록 폭포 대기시간 포함해서 4,800페소란다. 적정금액이라 생각됐지만 혹시나 싶어, 깎아줄 수 있냐니까, 베리 얼리모닝 하드 드라이브 앤드 롱롱타임 드라이브라기에 또 수긍돼서 알겠다 했다. 터무니없이 높은 금액을 부른 뒤에 팍팍 깎아주는 방식에 익숙한데 이 양반은 본인이 받을 적정금액을 부른다. 가격흥정 하느라 진땀을 빼 본 사람은 그 일이 얼마나 힘든 지 안다. 혹시라도 덤터기 쓰는 거 아닌가 신경 안 쓰는 것만으로도 호감도 급상승!
오슬롭 고래상어 투어 대기줄이 장난 아니게 길다던데, 패스트트랙 입장권 때문에 후순위로 밀려나고, 2~3시간씩 기다리기도 한다던데, 대신 예약해 줄 수 있냐니까 현장에서 구매하니 안된다며 공항에서 오슬롭 바로 가면 첫 탑승그룹 입장권 살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란다. 말은 안 했지만 내가 한두 번 거길 간 게 아니야,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이런 느낌이었다. 카톡 프사가 비슷한 나이대로 보여 우린 50대 중반인데 나이가 어떻게 되냐니까 55세란다. "오~ 우리 친구"라니까 크리스가 좋아요 버튼을 눌렀다. "그럼 픽업 및 드라이브 예약된 거제?", "응. 23일 공항에서 봐", 그렇게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택시기사와 12시간 가까이 동행하는 예약을 카톡만으로 했다.
3월 19일 13:57, 며칠 뒤면 출발이라 확인과 안부를 겸해 연락했다. 항공권 E-티켓 사진을 보내며 "안녕, 크리스?", 영어가 잔뜩 적힌 서류 사진을 보내며 "안녕, 리? 미안한데 23일 내가 잘 아는 아주 좋은 친구가 대신 픽업할 거야"라기에 이게 말로만 듣던 수수료 먹고 다른 택시기사에서 넘기는 수법인가 싶어, "며칠 안 남기고 이러는 게 어딨냐?", "정말 미안해. 몸이 안 좋아 병원 갔더니 복부에 이상이 있다고 검사를 받아야 된대." 보내준 서류 사진을 번역기로 돌려보니 23일 도착 당일에 병원에서 검진을 하루 종일 받는다. 좀 전에 그에게 쏟아냈던 불신의 말들이 머쓱해져서 이런 사정인지 몰랐다, 미안하다. 검사 잘 받고 별일 없을 거고 건강하길 바란다니 고맙다며 같이 못해서 미안하고, 여행 잘하고 건강하게 돌아가란다.
Cris의 소개로 알게 된 RUDY를 카톡 친구로 추가하고, 크리스한테 소개받고 연락한다니까 크리스한테 내용 전달받았단다. 김해공항에서 출발 기다리며 좀 있다 보자며 카톡 보냈더니 알겠다며 'mam'이란다. 으음... 이건 뭘까? 혹시 우리를 여자로 아나 싶어 우리는 남잔데 계속 mam이라 하냐니까 미안하다며 바로 'sir'로 바꾼다. 크리스가 우리 정보와 일정을 제대로 전달한 거 맞겠지? 옆에 동료에게 얘기했더니 이런 식으로 해서 돈 더 달라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고 걱정하기에 지금 아니다 싶어도 바꾸기엔 늦었고 하늘이 무너져도 쏟아날 구멍이 있듯, 프리다이버에게 조급함은 금물이니 느긋해지자며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을지 몇 시간 뒤면 알 수 있고, 돈은 후불이라 택시기사가 딴짓을 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 안 해도 된다 했다. 여행준비에 비해 술술 풀린다 싶더니, 느슨해졌던 감각이 살짝 당겨지는, 이게 여행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