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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들려준 외할아버지의 태교

by 딜리버 리

지금 직장에 귀하디 귀한 여성 택배 노동자가 단 한 명 있다. 택배노동이 하루 종일 트럭 운전에 무겁고 부피 큰 물량에 계단 오르내릴 일이 많아서 남자들도 며칠 해보고 관두는 경우가 허다할 정도로 노동강도가 센 편이다. 신체적으로 남성에 적합하고, 여성에겐 맞지 않으니 여성이 적은 건 당연하다. 남녀 성비를 얘기하기 미안할 정도로 남자만 득실대니 조직문화 역시 사설 용병 군대 수준일 수밖에 없다.


어쨌든 그를 처음 봤을 때 아이고 저렇게 갸느린 몸으로 얼마나 버틸까 싶었다. 말이 좋아 군대 같은 거지 여성 비하와 욕설이 자연스러운 조직 문화에 힘든 노동강도에도 불구하고 4년째 버티고 있다. 웬만해선 동료 지원을 안 받고 늦게 끝나더라도 본인 물량은 스스로 해결하려는 악과 깡을 가진 당찬 여성이다.


유일무이한 귀한 사람이니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사다. 사내 연애 소문이 퍼지자 수많은 남자들이 분노했고, 올해 초에 임신 소식을 알려지자 절망의 탄식 소리가 들려왔고, 4월에 결혼한다니 원래 관심없던 사람처럼 등을 돌린 남자 동료들이 부지기수였다.


임신 중이라 배송 업무에서 빠지고 내가 하고 있는 세척 업무로 배치되어 자주 보는데자기 엄마가 나보다 2살 적다며 농담 삼아 아버지라 부른다.


어제 점심 먹고 휴식 시간에,

-신경림 시인 아나?

-모르는데요

-돌아가셨대. 젊은 시절 좋아했던 시를 쓴 분인데

-아버지, 시도 읽어요?

-와? 택배족은 시 읽으마 안되나?

-아니~ 개멋져서요

-(배를 가리키며) 알라(아이)가 듣는다

-아아~

-읽어주까?

-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법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되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시 낭독하듯이 읽고 자리에 앉자,

-오오오~

-어려븐 단어도 없고, 좋제?

-네. 근데 오래됐어예?

-1988년에 나왔으니 오래됐지

-내보다 나이가 많네

-니는 가난을 핑계삼지마, 이런저런 핑계로 사랑을 버리지 마. 재밌게 살아

-아~ 택배 하면서 시낭독도 듣고, 오늘은 외할아버지가 태교 했네

-외할아버지?

-내한테 아버지니까 야한텐 외할아버지 맞지예

-그렇네


어쩌다 보니 직장 내 최고령자와 최연소자가 동료로 어울려서 시낭독으로 태교도 하고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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