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들의 춤

『맴』

맴.jpg 『맴』글 그림 장현정| 킨더랜드| 2015


초록 숲 속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립니다. 짙은 초록색으로 칠해진 나무들, 그런데 그 초록은 각각 조금씩 다릅니다. 진한 초록, 풀색에 가까운 초록, 조금 옅은 초록, 연두.


바람에 날려 떨어진 나뭇잎이 글자로 변해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장현정. 작가 이름이 얇은 글씨체로 떠오릅니다. 수줍은 모양새입니다. 그리고 짙은 글자 하나 오른쪽 상단에 박힙니다.

'맴'


KakaoTalk_20200608_153848207.jpg 위의 책 한 페이지, 장현정 그림


면지를 넘기고 페이지를 천천히 넘겨봅니다. 결이 느껴지지만 유난히 부드러운 하얀 종이입니다. 그림에는 흰색의 여백이 많습니다. 흰 페이지에 분홍 꽃잎 하나 ‘툭’ 떨어져 있습니다. 나무도 조금만 보입니다. 맴이라는 글자도 여기 저기 숨어 있습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나무는 많아지고 글자도 많아집니다.

매애, 맴, 치르르르르르, 츳

매미 소리인 듯한 글자들이 보입니다.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것 같은 숲의 정경이 두 페이지 가득 나타납니다. 이건 나무의 또 다른 꼭대기 모습이네요. 거기에도 맴이라는 글자는 여기 저기 살아 꿈틀댑니다.


숲을 지나가니 빌딩들이 나타납니다. 나무숲이 아니라 빌딩숲입니다. 빌딩과 자동차들은 회색과 검은색이 주를 이룹니다. 붉은색도 있습니다. 붉은색은 점점 많아지고 짙어집니다. 글자 맴은 어디 있나요? 도시에서 나는 여러 소리들과 함께 뒤섞여 잘 보이지 않습니다.


KakaoTalk_20200608_153848207_03.jpg 위의 책 한 페이지, 장현정 그림


숲에서는 바람 소리만 난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도시에는 소리가 참 많습니다.

맴, 치르르르, 빵빵, 부르릉, 빠앙, 베짱

글자들은 붉은색, 갈색, 회색으로 변합니다. 도시 열기에 철근들은 흐물흐물해지고 눈은 뱅글뱅글 돌아갑니다. 너무 너무 덥습니다.


어느새 글자들이 신경질적으로 변했습니다. ‘맴’도 ‘치르르르’도 붉은색으로 변해, 있는 힘껏 악을 씁니다.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뒤섞인 글자들은 아우성치며 붉은 원 안으로 ‘스윽!’ 빨려 들어갑니다.


순간 정적.

모든 소리를 집어 삼켰습니다.


다음 페이지. 맴이라는 글자가 하늘에서 하나 둘 내려옵니다. 초록색에 푸른색이 조금 더해진 청록색입니다. 후두둑 빗줄기로 변해 창을 때립니다.


KakaoTalk_20200608_153848207_01.jpg 위의 책 한 페이지, 장현정 그림
KakaoTalk_20200608_145309179_02.jpg 위의 책 한 페이지, 장현정 그림


여름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매미를 생각합니다.


『맴』은 몇 개의 색과 의성어로 매미와 여름날의 심정을 보여줍니다. 페이지를 차례차례 넘기다 보면 한 여름 날 느낄 수 있는 여러 기분들이 느껴집니다. 시원함, 뜨거움, 청명함, 여유로운, 어지러운, 신경질적인, 후련한…….


소리도 들립니다. 주된 소리는 매미 소리입니다. 같은 소리도 어디서 듣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작열하는 태양이 내리쬐는 한낮, 울창한 숲 속에 있었다면 매미소리는 노래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무가 드리우는 큰 그늘 아래서 바람을 맞으며 매미 소리를 들었다면 애절한 매미의 생애를 생각하며 안타까운 마음 한 자락 떠올렸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도시의 여름은 너무 뜨겁습니다. 열섬이 된 듯, 용광로가 된 듯 지글지글 끓어오릅니다. 그 속에서 듣는 매미소리는 짜증스럽습니다. 애절한 노래가 아니라 시끄러운 아우성일 뿐이지요. 안타까운 매미입니다.


뜨거운 도시,

천덕꾸러기가 된 매미 소리가 아니라 숲에서 매미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 하나의 그림


여름이 오면 난 항상 생각해

까뮈의 <이방인>

주인공 뫼르소를


미간을 쪼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

권총을 쏜 뫼르소를


이 그림책을 보면서도 생각났어

그 뫼르소가


더운 여름,

그건 충분히 가능한 몸짓이었을까?

모든 것을 삼켜버린 붉은 원


여름이 오고 있어.


KakaoTalk_20200608_151014237.jpg 위의 책 한 페이지, 장현정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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