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상자』
글 없이 그림만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어떨까요?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면 굉장히 친절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세밀한 묘사로 차근차근 이야기를 따라가도록 만든 데이비드 위즈너의 그림책은 참 친절합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크기도 다양하게 각각 나눠진 칸을 따라가다 보면 아하~ 라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친절하지만 뻔하거나 진부하지는 않습니다. 그림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독자의 예상을 훌쩍 넘어섭니다.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 수 있을까? 상상을 어떻게 이런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 싶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수중 카메라입니다. 위즈너는 카메라의 시점을 빌어 그림을 그렸습니다. 클로즈업해서 보기, 파노라마처럼 넓게 펴서 보기, 자세를 한껏 낮추어 보기. 카메라의 눈으로 그린 그림들이 가득합니다. 클로즈업된 컷은 다음 장을 넘기면 전경이 나오며 어떤 장면의 클로즈업 그림인지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 여러 요소들이 세밀하게 그려졌지요.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해변에서 한가롭게 하루를 보내는 가족이 있습니다. 엄마 아빠는 파라솔 밑 캠핑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습니다. 아이는 돋보기로 바닷가의 생명체들을 관찰합니다. 모래사장 위에는 돗자리도 있고 양동이와 함지도 있습니다. 함지 뚜껑 밖으로 문어 다리가 삐죽 나와 있네요. 현미경도 보입니다.
돋보기로 소라게를 보던 아이는 심심한지 바다로 나가봅니다. 갈매기도 보이고 꽃게도 있습니다. 몸을 한껏 낮춰 꽃게를 바라보다 파도가 덮쳐 물벼락을 맞습니다. 물에 젖은 생쥐가 되어 주저앉은 아이 앞에 수초가 듬성 듬성 묻어 있는 수중카메라가 나타났습니다. 둘은 서로를 마주합니다. 이 수중카메라는 어디에서 왔을까요? 어떤 사진이 담겨 있을까요?
데이비드 위즈너는 책의 두 면을 이야기의 강약 조절을 위해 자유자재로 사용합니다. 아이와 수중카메라가 처음 만나는 장면은 두 면 가득 해변으로 채웠지요. 카메라에서 필름을 꺼내 현상소에서 사진을 인화하는 과정은 작은 컷컷으로 시간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화된 사진은 페이지의 테두리를 검은색으로 둘러 그것이 사진임을 알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야기는 페이지를 넘기며 착착 진행됩니다.
사진에 담긴 풍경이 바다 저 너머 깊은 곳에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대상을 그대로 포착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상기한다면(물론 현란한 사진 합성 조작이 가능한 요즘은 그렇지도 않겠지만요.) 그것은 분명 어딘가에는 실제하는 풍경일 것입니다. 데이비드 위즈너의 상상의 바다 속 풍경 속으로 빠져듭니다. 복어 열기구, 거북등소라마을, 불가사리 섬, 인어나 외계인 같은 작은 생명체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진 속의 사진 속의 사진 속의 아이들.
이 아이들은 누굴까요? 사진으로, 현재의 아이는 오래 전 살았을 아이들과 만났습니다. 그들은 과거 분명 존재했던 아이들이고 똑같이 카메라를 만났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마치 미래를 향한 시그널 같습니다. 누군지, 어느 시간 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깜박깜박 찰칵!' 하고 카메라로 말을 건넵니다. 돋보기, 현미경을 가지고 사진을 열심히 들여다 보던 아이는 마침내 자신의 사진을 찍어 카메라를 바다로 돌려보냅니다. 다른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카메라는 다시 여행을 시작합니다.
시간 상자…….
카메라는 시간을 담는 상자입니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말이 있지요. 자고 나면 하루가 도착합니다. 하루를 살아가고 다시 저녁이 되고 어제와 다를 거 없는 오늘, 오늘과 다를 거 없는 내일 같지만 시간을 붙잡고 싶은 날들도 있습니다.
기억은 희미해지고 많은 부분 사라지지만 사진으로 찍어 놓으면 그 순간이 정지된 화면으로 내 손에 남습니다. 신기하지요. 사진을 보며 그 시간을 추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카메라는 시간을 기억하는 상자, 시간을 담는 상자인 거겠지요. 『시간상자』는 시간을 잡는 도구인 카메라가 보여줄 수 있는, 그것이 빚어낼 수 있는 멋진 상상의 세계를 그림만으로도 잘 보여주는 그림책입니다.
(*현재 베틀북 판은 절판이고 시공주니어에서 재발행되었습니다.)
이 하나의 그림
시간을 견뎌냈을 것 같은 사물들
시간의 흔적을 새기고 있는 것들,
시간을 품고 있는 것들,
시간을 기록할 수 있는 것들,
화석 같은 것들,
시간 속에서 단단하게 여물었을 그것들이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정갈하게 배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