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린 겨울의 색

『북쪽 나라 여우 이야기』

『북쪽 나라 여우 이야기』 글 그림 데지마 게이자부로| 정숙경 옮김| 보림| 2006


여우를 보러 갔습니다. 여우는 우리나라에서 멸종 위기 동물 1급에 해당합니다. 반달가슴곰, 산양에 이어 국가가 앞장서 복원 하고 있는 동물입니다. 우리나라 여우는 붉은 여우입니다. 붉은 여우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전 세계에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습니다.

여우는 개과에 속하지만 개보다는 주둥이 쪽이 좀 더 갸름하고 뾰족합니다. 그리고 붉은 여우는 여러 특징이 있습니다. 귀 뒤가 검은 색이고 꼬리 끝은 하얗습니다. 정말 귀엽고 앙증맞은 건, 검은 네 발입니다. 마치 발목 양말을 신은 듯, 검은 장화를 신은 듯 발만 검습니다. 그 네 발로 총총총 우아하고 사뿐히 걸어 다닙니다. 털 색깔은 주로 갈색이지만 털갈이 전 털이 북슬북슬할 때 햇빛을 받으면 붉은 빛을 띤다 해 붉은 여우랍니다. 야생에서 뛰어 다니다 햇빛을 받아 붉게 빛나는 여우, 직접 마주하고 싶어집니다.

다녀와 『북쪽 나라 여우 이야기』를 꺼내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표지 그림 하얀 눈밭에 당당하게 서 있는 여우, 바로 붉은 여우입니다. 가슴 부분과 꼬리 끝이 하얗고, 검은 네 발, 붉은 털, 끝이 뭉툭하지만 탐스러운 꼬리가 붉은 여우임을 보여줍니다. 그림책 작가들은 여우 이야기 하나를 쓰기 위해 이런 고증도 하나? 놀랍고 그 노력이 존경스러워집니다.


데지마 게이자부로는 주로 목판화로 그림책 작업을 하는 작가입니다. 판화 하면 단순한 선과 검은색이 먼저 떠오릅니다. 『북쪽 나라 여우 이야기』도 굵직굵직한 검은 선속에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밤, 새벽, 아침으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는 숲의 사위(四圍), 조각처럼 떠 있는 노란 달, 나무와 여우의 푸른 그림자, 빽빽한 나무에 쌓인 하얀 눈 등이 주된 풍경입니다.


거대한 숲 속에 여우는 홀로 있습니다. 여우의 습성을 몰랐다면 ‘이 녀석은 왜 가족이나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을까?’ 안쓰럽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우는 어미의 보살핌이 끝나면 홀로 굴을 파고 홀로 먹이를 찾아다니는, 개별 생활을 하는 동물이라고 하네요. 그렇다 하더라도 혼자 겨울을 나는 것은 역시나 춥고 배가 고픕니다. 걷고 또 걸어도 끝없이 눈밭만 펼쳐지는 숲 속, 북쪽 나라 붉은 여우는 과연 이 숲에서 어떤 풍경을 만나게 될까요?


위의 책 한 페이지, 데지마 게이자부로 그림


이야기를 따라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겨 봅니다. 판화라 검은색, 회색 등이 주조를 이룰 것 같은데 의외로 다양한 색이 나옵니다. 이 순간을 만날 때 호흡이 저절로 멈추게 됩니다. 단순하고 투박하지만 강렬합니다.


뼈 속까지 시리고 추운 겨울밤은 푸른빛입니다. 밤이 물러나고 해가 뜨기 직전 사위는 가장 어둡습니다. 두 페이지에 걸쳐 잠시 갈색과 회색조를 띱니다. 그러다 아침이 밝아오면 숲은 보랏빛으로 변합니다. 햇빛이 슬며시 스며든 밝은 야광의 보랏빛입니다. 시간이 변하면서 겨울 숲의 색은 이렇게 변합니다. 우리는 이 책에서 그렇게 겨울 숲의 색과 만납니다.


노랑과 주황으로 가득 찬 페이지도 있습니다. 엄마와 형제들과 함께 했던 봄과 여름의 날들입니다. 여우는 민들레와 달맞이꽃, 커다란 보름달 아래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전 페이지와 색의 대비가 확연해 그 때의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위의 책 한 페이지, 데지마 게이자부로 그림
위의 책 한 페이지, 데지마 게이자부로 그림


판화여서 한 페이지에서 톤이 미묘하고 다양하게 변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페이지마다 딱 그 시간과 감정에 어울리는 색이 등장합니다. 그 색들은 검은 윤곽선으로 인해 더욱 선명하고 진하게 다가옵니다. 여우의 털은 마치 빗질을 한 것처럼 가지런하게 하나하나 다 살아 있습니다. 작가의 정성과 섬세한 감각이 더욱 잘 드러난 부분입니다.



비 오는 날은 소란스럽습니다.

투둑투둑 떨어지는 빗소리가 온 사방을 깨웁니다.


눈 오는 날은 조용합니다.

눈이 세상의 소리들을 모두 포근하게 덮어 버립니다.

그래서 조그만 소리도 더 선명하게 들리고 주변은 더욱 고요해집니다.


반짝거리는 겨울 숲에서 한 마리 여우와 함께 겨울 숲이 빚어내는 풍경을 만납니다. 한껏 춥고, 시리고 신비롭고 황홀해집니다. 여우는 이제 혼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시림 속에서도 가슴 한 편이 발그레 따뜻해집니다. 자연 속에서 모든 생명은 이렇게 순환하며 살아갑니다. 계절도, 시간도 가고 옵니다. 끝없이 흘러가는 속에서 이렇게 순간 순간의 색과 추억을 잡아내 기억하는 일은 그래서 귀하고 소중합니다.


이 하나의 그림


눈 쌓인 숲 속에서

홀로 밤을 맞았다.

겨울

반짝반짝 빛난다.

한 무리 사슴 떼가 하늘로 날아오른다.

숲의 정령

꿈이자 환상이자

외로운 밤, 위로이다.


위의 책 한 페이지, 데지마 게이자부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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