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고와 분홍돌고래』, 김한민 글 그림, 우리교육, 2008 우리교육 책은 절판되었고 비룡소에서 2018년 개정판이 나왔다.
도시가 아니고 울창한 숲속에 산다면 하루를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잠시 여행 차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첫 날 무조건 볕이 좋고 바람이 살랑 불어오는 곳을 찾겠습니다. 그곳에 누워 커피 한 잔과 책 한 권의 여유를 즐기겠습니다. 더운 곳이라면, 따가운 태양빛을 가릴 큰 밀짚모자 하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요. 그런데 그 하루가 계속된다면? 휴가가 아니라 매일이 그렇다면, 그리고 내가 생활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어린아이라면 그곳에서 매 번 돌아오는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자연이 주는 여유로움이 있습니다. 자연은 태생적으로 그런 것 같습니다. 특정한 목적 없이 꾸준히, 천천히 자신의 모습대로 움직입니다. 여기 그런 자연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내는 세 친구가 있습니다. 웅고와 하마, 악어입니다. 그들은 매일 분홍돌고래를 기다립니다. 오늘 못 만나면 내일 또 기다립니다. 그곳에는 시계가 없습니다. 아니, 없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해의 위치로 시간을 압니다. 해가 나무 위에 오면 만나기로 약속하고 해가 낮아지면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매일 분홍돌고래를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것, 아이들이 못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아이들에게 기다림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싶지만 이들은 끈덕지게 기다립니다. 분홍돌고래를 보기 위해 깊은 늪으로 오래 걸어 들어가고 늪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심심하면 나뭇잎멀리던지기 놀이를 합니다. 기다리는 일이 하루 하는 일의 전부입니다. 이렇게 여유로워도 될까요? 이렇게 아무 일도 안 해도 될까요? 물론 웅고는 어린 아이입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 땅의 아이들 또한 이렇게 여유로워서 안 될 이유가 뭐가 있을까 싶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왜 그렇게 바쁠까? 뭐가 그렇게 바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위의 책 면지 부분에 그려진 그림, 드로잉만으로도 울창한 열대 우림의 숲이 느껴진다. 웅고와 하마와 악어, 김한민 그림
웅고와 친구들은 분홍돌고래를 같이 기다리지만 각각의 생각은 다릅니다. 웅고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지만 악어는 악어거북이라도 보면 집에 간다 말합니다. 하마는 배가 고파지면 집에 간다 합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합니다. 분홍돌고래를 보고 싶은 마음은 같지만 각자 할 수 있는 한계치는 다릅니다. 웅고는 거짓말로 얼버무리고 간 악어나 배가 고프다고 집에 가버린 하마에게 화내지 않습니다. 친구들을 붙잡지도 않고 친구들에게 서운해 하지도 않습니다.
웅고
이제 울창한 열대 우림 속에 웅고 혼자 덩그마니 남겨졌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소리가 납니다. 이제까지 듣지 못했던 소리입니다. 카피바라, 개미핥기, 물총새, 긴팔원숭이, 방울개구리가 내는 소리입니다. 이 녀석들은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걸까요? 웅고는 그제야 그것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웅고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도 보게 됩니다. 항상 주위를 감싸고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입니다. 홀로 남아야만 보이는 것들입니다.
위의 책 한 페이지, 김한민 그림
흔히들 배가 불러야 생각도 할 수 있고 여유도 부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배가 부르다고 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돌아보고 살펴볼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잠시 고요하게 홀로 머무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시, 분을 다퉈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야 하는 생활 속에서보다는 분홍돌고래를 기다리는 일이 전부인 자연 속에서나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꽉 움켜쥐고 있는 것에서 조금은 여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주먹도 조금 펼 수 있습니다.
웅고는 아마 분홍돌고래를 만나기 위해 여러 날을 계속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에야 비로소 분홍돌고래를 놓아 줄 수 있었습니다. 웅고는 더 이상 분홍돌고래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집에 돌아갔던 하마와 악어는 늪에 혼자 있을 웅고가 걱정되어 다시 옵니다. 분홍돌고래를 봐야만 집에 가겠다는 웅고를 위해 분홍돌고래 가면을 만들어 쓰고 말이지요. 다정한 친구들입니다. 집으로 향하며 하마와 악어는 웅고에게 묻습니다. 돌고래를 봤냐고. 웅고는 방그레 웃으며 대답합니다. “응! 본거나 다름없어.” 웅고는 내일도 분홍돌고래를 기다릴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어느 쪽이든 이제는 별로 상관없을 듯 합니다.
32페이지 그림책이지만 눈앞에 아름답고 울창한 자연이 펼쳐집니다. 오일파스텔로 쓱쓱 칠해진 열대 우림, 아마존의 풍경이 두 면 가득 펼쳐집니다. 크레파스로 그린 것처럼 거친 질감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더 잘 감상하기 위한 비밀이 있습니다. 눈앞에 가까이 두고 혼자 읽어서는 그 맛을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누군가 읽어줄 때, 거리를 두고 그림만을 볼 때 웅고가 있는 자연이 성큼 더 다가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는 누군가 옆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나에게 그림책을 읽어 줄 한 사람이 간절해집니다. 기다림의 여유, 거리의 여유, 나 이외에 한 사람을 더 원하는 마음의 여유를 웅고와 친구들은 알려줍니다.
위의 책 한 페이지, 김한민 그림
이 하나의 그림
웅고는 흑인 아이다.
피부색은 짙은 갈색이고 머리카락은 밝은 노랑색이다.
웅고는 한쪽 손을 쫙 펼쳐 선언하듯 야무지게 말한다.
분홍돌고래를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그런데 웅고의 갈색 입술과 손바닥에 연한 핑크색이 있다.
웅고를 통해 처음 알았다.
흑인의 입술과 손바닥이 연한 핑크색을 띠기도 한다는 것을.
한 번도 눈길을 줘보지 못한 색의 표현이다.
작가는 섬세하게 그 연한 핑크를 표현했다.
대충, 아무렇게나 그려진 웅고가 아님을 알겠다.
웅고의 입술과 손을 살며시 문질러 본다.
부드럽고 많이 따뜻할 것 같다.
위의 책 한 페이지, 김한민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