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개 할망』
가끔 글보다 그림이 압도적인 작품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계속 넘겨보며 감탄합니다. 보고 또 보며 그림을 손으로 문질러 보고 쓰다듬기도 합니다. 무슨 재료로 그린 거지? 어떤 작업이지? 어떻게 이렇게 부드러우면서 선명한 색감이 살아나는 거지? 당장에라도 작가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어집니다.
‘해녀’는 신비롭습니다. 강인함과 경외심이 같이 느껴집니다. 어릴 때부터 나이가 많이 들 때까지 삶 전체에 걸쳐 또는 대를 이어지는 일이라는 느낌이 강해 섣불리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물개 할망>은 그런 해녀의 삶을 사는 할머니와 손녀의 이야기입니다.
면지부터 그림과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색종이를 오려 붙인 것 같은 노란 달이, 세모를 그리며 출렁이는 푸른 바다 위에 떠 있습니다. 바다 위에는 해녀 같기도 하고 물개 같기도 한, 머리와 몸체를 지닌 어떤 것이 검은색으로 스윽 그려져 있습니다. 왜 갑자기 물개냐구요? <물개 할망>은 아일랜드 물개 설화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갑니다. 검은 작업복을 입은 해녀의 모습에서 물개의 검고 미끈한 몸이 자연스럽게 연상됩니다.
옆으로 조금 더 넓은 판형의 책입니다. 페이지를 펼치면 두 페이지가 널찍하게 펴지지요. 그림은 이 두 면을 모두 이용해 그려졌습니다. 주된 색은 바다의 푸른색, 해녀복의 검은색, 테왁의 주황색입니다. 대비가 선명한 세 가지 색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선명하고 시원합니다.
큼직한 화면, 선명한 대비의 색상도 좋지만 아기자기한 구성도 돋보입니다. 면지 다음 페이지 불가사리, 소라, 문어, 전복 등 바다 해산물들이 페이지 밑에 노란색으로 흩어져 있는데요, 알고 보니 할머니가 메고 가는 테왁에 달린 그물에서 하나씩 빠져 나온 것들입니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알 수 있지요. 그것들은 노란별처럼 점점이 바닥에 박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책장을 따라가도록 우리를 인도하며 이야기 속으로 이끕니다.
처음 몇 페이지에 나오는 그림들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풍경입니다. 한 해녀가 주황색 테왁을 팔에 껴안고 몸을 쭉 뻗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나갑니다. 그런데 여기 하늘인가? 바다인가? 잠시 착각합니다. 뭉게구름이 둥실 둥실 떠 있거든요. 아, 푸른 바다에 하늘의 구름이 비친 것입니다. 바다가 아니라 하얀 뭉게구름을 헤치고 푸른 하늘을 유유히 헤엄쳐 가는 해녀를 잠시 상상해 봅니다.
손녀는 할머니가 물질을 나갈 때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까봐 겁이 납니다. 폭풍우가 치는 날에도 할머니는 빗줄기를 뚫고 바다로 나갑니다. 빗발은 냄새와 굵기를 표현하듯 톤이 다른 다양한 푸른색으로 화면을 때리듯 거칠게 그어져 있습니다. 할머니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손녀는 검은 바위에 서서 화면 끝까지 차오른 푸른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봅니다. 드디어 저 멀리 할머니의 테왁이 보입니다.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형광색 같이 밝은 노란 수평선을 보이는 청명한 바다, 물결은 어느새 잔잔해졌습니다.
해녀와 바다 그리고 할머니와 손녀의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그림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책의 압권은 뭐니 뭐니 해도 5장 즉 10페이지에 걸쳐 그려진 바다입니다. 손녀는 할머니에게 물질을 배운 후 처음으로 바다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욕심내지 말라는 할머니의 당부를 잊고 반짝이는 것을 줍기 위해 밑으로 한 발자국 더 내려가지요. 그러다 물숨을 먹고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맙니다.
손녀가 처음으로 들어가 만난 바다는 다채롭습니다. 처음에는 이전과 색과 풍경이 비슷한 평온한 바다입니다. 그리고 바다 속 세상은 노랑, 빨강, 보라, 초록, 파랑 등 형형색색 화려합니다. 물고기와 수초들이 사는 신비로운 세상이지요. 하지만 아이가 물숨을 먹고 가라앉기 시작하자 바다는 돌변합니다. 바다는 어느새 짙은 푸른색과 보라색으로 가득 찼습니다. 수초조차 아이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듯 마녀의 손가락처럼 길게 뻗어 너울거립니다. 그리고 어두운 초록과 푸른색으로 덮힌 암흑의 바다 밑바닥에 아이는 거꾸로 놓입니다. 어두운 화면을 더욱 어둡게 하는 큰 그림자가 나타납니다. 아이를 구하러 온 물개 형상의 그림자가 화면 가득 드리웁니다.
위기감이 고조되는 이야기에 그림이 한껏 할애되어 분위기가 점층적으로 더욱 잘 다가옵니다. 바다는 이토록 다채로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바다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더불어 바다와 함께 하는 해녀의 삶도 이렇게 매 순간 목숨을 내던지는 일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도 같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긴 아이는 이제 할머니가 자신을 두고 떠날까봐 더 이상 두렵진 않습니다. 바다 속 용왕 할망에게, 할머니는 지켜야 할 것이 있어 꼭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일까요? 사실 저는 이야기 결말 부분은 조금 모호하게 느껴집니다. 앞에 언급한 물개 가죽 이야기를 다시 꺼내며 ‘진짜 물개 가죽을 찾았거든’ 이라고 끝을 맺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잘 와 닿지 않습니다.
아이가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자신도 스스로 물질을 해봤기 때문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살면서 맞닥뜨리는 많은 것들이 모르면 더 무섭고 알고 나면 그나마 두려움이 덜해지기도 하니까 말입니다. 어쨌든 마무리의 모호함에도 <물개 할망>은 제주도의 다양한 바다 풍광과 할머니와 손녀의 따뜻한 이야기가 매력적으로 어우러진 그림책입니다.
이 하나의 그림
밑으로 몸이 자꾸 가라앉는다.
뽀글뽀글
숨방울만 위로 올라간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던 바다 속 생물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어둡고 짙다.
암흑과 적막
어두운 초록
어두운 파랑
어두운 보라
바다가 이렇게 무서운 곳이었나?
나는 죽는 건가.
저 멀리서 큰 그림자가 다가온다.
물개?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