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를리외르 아저씨』
그림책을 읽다 보면 ‘아, 이 책! 누가 좋아하겠다.’라고 어떤 사람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이세 히데코의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를 읽으면 그들이 떠오릅니다. 출판사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두 명의 선배 편집자들은 책을 무던히도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책 만드는 법뿐만 아니라 책을 대하는 태도까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띠지, 책등, 면지, 가름줄 등 책을 이루는 요소들은 모두 이름이 있습니다. 행 간격, 글자 간격, 쪽 번호 글씨체, 크기, 위치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 계산되지 않은 채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잘 만들어진 책 한 권이 세상에 나왔을 때의 기쁨, 그것 때문에 그들은 책 만드는 일을 계속하고 책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습니다. 덕분에 새 책을 만나면 책의 향기와 종이의 결을 먼저 느끼는 버릇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책을 사면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손으로 표지와 종이를 쓰다듬어 봅니다.
얼마 전 출판사가 배경인 드라마에서 한 편집자가 이런 말을 합니다. ‘어제까지 이 세상에 없던 것’ 저는 이 말이 그렇게나 좋았습니다. ‘어제까지 이 세상에 없던 것’을 있게 만드는 사람과 일은 얼마나 대단한지요. 『나의 를리외르 아저씨』에서 를리외르도 그런 사람입니다. 조금은 다른 의미지만 말입니다.
책 커버에는 RELIEUR ET ROBIBIER(를리외르와 아카시아)라고 씌어 있습니다. 가지를 넓게 뻗은 나무 아래 푸른 옷을 입은 소녀가 바람처럼 스치듯 달려갑니다. 푸른 기운의 나무와 그림자. 이른 새벽일까요? 겨울의 찬 기운일까요? 소녀는 어디로 달려가고 있을까요?
이 책은 를리외르와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소녀의 이름은 소피입니다. 를리외르는 끝까지 를리외르 아저씨로 이름이 없습니다. 아마 를리외르를 대표하는 주인공이겠지요. 한 쪽 페이지는 소피가 가는 길을, 다른 쪽 페이지는 를리외르가 가는 길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거리를 걸어 어딘가로 향합니다. 알고 보면 그들은 서로 멀리 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른 채 스치고, 만날 듯 엇갈리다 를리외르 간판을 단 푸른색 문 앞에서 마주칩니다. 소피는 자신의 식물도감을 고치고 싶어 를리외르를 찾아 왔습니다.
그 후 책은 를리외르가 작업하는 공간, 도구, 순서, 방식 등을 글과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를리외르는 소피의 책을 처음 대하는 순간부터 책을 어떻게 새롭게 탄생시킬지 이미 구상을 한 것 같습니다. 식물도감에서 아카시아 그림을 먼저 미리 떼어 놓습니다. 소피는 옆에서 그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끊임없이 재잘댑니다. 책의 표지로 쓸 종이의 색을 ‘숲 색깔’이라 말하는, 참으로 스스럼없고 당찬 소녀입니다. 덕분에 묵직하게 다가올 수 있는 를리외르의 일 하는 장면 장면에 생기가 돋습니다.
한바탕 작업을 끝낸 후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와 400살도 더 된 아카시아 밑 벤치에 앉아 같이 빵을 먹습니다. 표지에 나왔던 그 나무 같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날 책을 찾기로 하고 헤어집니다. 과연 소피의 식물도감은 어떻게 재탄생했을까요?
작업실로 돌아와 를리외르는 역시 를리외르였던 아버지를, 그의 일하던 모습, 말들을 회상합니다. 이 부분은 옅은 갈색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나무옹이 같은 손이 하는, 작지만 소중한 일의 수고로움이 손 그림만으로 부각됩니다.
“이름을 남기지 않아도 좋아.
얘야, 좋은 손을 갖도록 해라”
아버지 를리외르의 말이 눈에 남습니다.
다음날 아침 소피는 새로 싹이 난 화분을 선물로 가지고 갑니다. 푸른색 문 옆 윈도우 갤러리에는 다시 태어난 자신의 책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책’입니다.
이지은의 『유럽 장인들의 아틀리에』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 유럽 장인들의 아틀리에를 방문하고 쓴 글입니다. 고루하고 꼿꼿하고 깐깐하고 예민할 것만 같은 장인(匠人)의 이야기는 빠르게 버리고 새로 사고 쉽고 편한 것을 찾는 우리에게 큰 여운을 납깁니다. 그들의 모습을 담은 세피아톤의 사진 중 많은 사진이 바로 손을 찍은 사진입니다. 손톱이 다 닳아 짧아진, 툭툭 마디가 불거지고 주름이 많이 간 손들입니다.
둔탁하고 거친 그 손은 손의 노동이 지니는 가치를 새삼 돌아보게 합니다. 무언가를 짓는 일, 밥을 짓고, 집을 짓고, 바느질을 하고 뜨개질을 하는 등 손으로 촉감을 느끼고 손을 움직여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일은 지난한 반복과 인내를 요구합니다. 이 일들은 들인 시간과 노력만큼 정직합니다. 그리고 손과 그 결과물은 들인 시간과 감각을 잊지 않고 고스란히 기억합니다.
손으로 책을 만드는 일, 책에 새 생명을 불러 넣는 일, 를리외르의 이야기를 하는 이 책 또한 손의 수고로움과 가치를 돌아보게 합니다. 소피의 책은 다시는 뜯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소피는 식물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 권의 책이 아이의 꿈과 함께 합니다.
이 하나의 그림
책 커버가 없는 상태로 책을 처음 만났다.
그래서 꽤 오랫동안 이 그림이 표지 그림인 줄 알았다.
푸른빛과 보랏빛이 도는 바탕에 마디가 툭툭 불거진 손이 있다.
두 손은 뭔가로 종이를 자르거나 눌러 접고 있는 듯하다.
칠판에 하얀 분필로 그린 듯한
오래된 나무의 거친 옹이 같은 두 손.
언젠가 사진으로 본 발레리나의 발이 떠오른다.
심하게 툭툭 튀어나온 뼈마디들에 적잖이 놀랐었다.
아프진 않을까?
끝없는 반복을 통해 생긴 인내와 고통의 흔적
그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발.
그 발처럼 표지의 손도 어떤 노동의 시간을 짐작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