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바다를 만나다

예전에 누군가 나에게는 바다보다 숲이 기운에 좋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답답한 일이 있을 때마다 바다를 찾았다. 첫 직장에서 다음 달 월급까지 쳐 주고 판화도 하나 선물로 줄 테니 제발 그만 나가 달라는 이야기를 듣고 잘린 후 달려간 곳도 삼척이었다. 같은 과 남자 선배의 할머니와 고모가 함께 사시는 집이었는데 무작정 부탁해서 갔다. 그곳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겨울 해돋이를 봤다.


바다는 넓고 아득하고 고요하다. 파도 소리가 들려도 고요하다. 인적이 드문 겨울에는 더욱 그렇다. 광활함 때문일까 아득함 때문일까. 왔다 갔다 왔다 갔다 쉼 없이 반복되는 파도의 움직임은 계속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다. 바람도 소리도 가슴을 뻥 뚫어준다.


바다를 그린 그림책은 많다. 『은지와 푹신이』 (하야시 아키코 글그림, 한림출판사)는 아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마주했을 모래사막과 바다를 두 페이지 펼친 면으로 그렸다. ‘아, 그림책에 이런 그림도 나오는구나’ 처음 봤을 때 감탄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판형을 크게 한다 해도, 빅북(요새는 출판사에서 빅북을 따로 많이 제작한다)이어도 페이지 안에 그려진 바다는 어쨌든 손 안의 바다 아니야? 싶을 수도 있다. 이 세 권의 그림책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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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커서 바다표범이 될 거야』(니콜라우스 하이델바흐 글그림, 김경연 옮김, 풀빛)에서 엄마는 바다 속 생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바다 트롤, 달고기 왕, 뽀뽀 뱀장어, 궁궐 두꺼비. 이게 뭔가? 이상하다 이상해. 엄마는 이런 생물들을 어떻게 알까? 이런 생물들이 정말 깊은 바다 속에는 있는 걸까? 앞쪽에는 페이지가 잘려 그려져 있지만 마지막 페이지에는 길게 양면으로 펼쳐지는 날개를 이용해 생물들이 모두 열 지어 등장한다. 이 모두를 싣고 다니는 고래와 함께, 아이가 자는 침대로 일렬로 다가온다. 아이는 잠을 잔다. 그래, 어쩌면 이건 모두 꿈인지도 모른다. 엄마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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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숨겨 놓은 바다표범 가죽을 찾은 아이는 엄마에게 아빠가 바다표범인 것 같다고, 가죽에 대해 말했다. 그런데 다음날 엄마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아이의 기분은 어땠을까? 엄마는 셀키*였을까? 아무도 모른다. 알고 보니 엄마의 모습은 어딘지 매끈하고 유연한 바다표범의 유선형 몸을 닮았다. 엄마가 사라진 후 가끔 고등어가 모래사장 바위 위에 놓여 있다. 아이의 그리움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걱정되었지만 아이는 좌절하지 않고 자신은 뱃사람이 되거나 바다표범이 될 거라고 말한다. 셀키 신화와 아이의 일상, 상상 속 바다가 결합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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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개 할망』 (오미경 글, 이명애 그림, 모래알) 인트로에 바로 이 셀키 신화가 나온다. 켈트족의 신화인데 제주도 이야기에 나온다. 엄마는 아마 바다표범이 되어 사라진 모양이다. 할머니와 사는 아이는 할머니도 바다표범으로 변해 자신을 떠날까봐 걱정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지킬 것이 있어 떠나지 않는다는 말을 용왕 할망에게 듣는다. 제주도의 자연은 참으로 아름답다. 큰 판형에 푸른 제주 바다, 주황 테왁, 하얀 뭉게구름, 검은 해녀복이 잘 어우러진다. 하얀 구름을 동동 비추는 푸른 바다, 넘실넘실 시원한 바다 풍경이 두 페이지에 펼친 면에 한껏 펼쳐진다. 할머니를 조르고 졸라 드디어 물질을 나가게 된 아이는 반짝이는 것에 홀려 한 번 더 깊이 들어갔다가 물숨을 먹고 바다 깊은 곳으로 굴러 떨어진다. 그 때 커다란 바다표범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아이는 목숨을 건졌다. 바다표범은 할머니였을까? 엄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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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제주 바다는 욕심을 내면 금새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두렵고 무서운 곳이다. 6페이지에 걸쳐 펼쳐지는 심해 장면은 해초가 '살랑 살랑'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마녀의 손가락을 뻗고 있는 것 같다. 알록달록 칠해진 초반의 아름다운 바다와는 사뭇 다르게 짙은 보라와 청록, 암청색으로 가득한 바다는 아이를 집어 삼킬 듯 하다. 사실 바다는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미지의 공간이지 않은가? 속을 켜켜이 알 수 없는, 영영 모를 수도 있는 신비스러운 곳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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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바다를 『시간 상자』 (데이비드 위즈너 그림, 시공주니어)만큼 절묘하게 보여주는 그림책도 없다. 게다가 이건 글없는 그림책이다. 데이비드 위즈너의 그림은 사실적인 묘사가 압권이고 보기 좋다. 여름 피서철 바다에서 엄마 아빠는 한가로이 여유를 즐기고 아이는 심심해서 이것저것 하다가 파도 한 방에 밀려 온 수중 카메라를 마주한다. 수중 카메라는 주인이 없고 필름이 들어 있다. 궁금한 아이는 현상과 인화를 끈기 있게 기다려 사진을 손에 쥐는데!


사진에는 이상한 생물들이 담겨 있다. 시간 상자=카메라인데 카메라는 실제로 있는 것을 그대로 기록하는(찍는) 기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지금은 포토샵과 보정 등이 난무하니 더 이상 이도 유효한 공식은 아니지만) 이 생물들은 바다 속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일 테다. 위즈너는 그것이 사진 속 이미지라는 것을 잘 알 수 있게 검은색 테두리로 페이지를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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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에는 비밀이 하나 더 숨어 있다. 바로 사진 속 사진 속 사진 속 아이들이다. 아이가 옆에 놓아두었던 현미경을 꺼내 배율을 높여 사진을 들여다보니 이 사진은 누군가 찍은 사진을 들고 또 찍고 찍은 것이다. 맨 처음 아이는 아마도 몇 백 년 전에 살았던 아이인 듯 싶다. 흑백사진인데다 옷차림을 보아 하니 말이다. 아이는 이렇게 시간 상자를 통해 이전의 시간과 만난다. 영리한 아이는 자신도 아이들이 찍힌 사진을 손에 들고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미련없이 카메라를 바다로 힘껏 던진다. 사진기는 사진에 등장했던 이상한 생물들에 이끌려 이리 저리 떠돌다 다른 지역에 있는 아이에게 가 닿는다.


아, 이런 시간 여행이라니! 바다를 배경으로 이렇게 황홀한 상상 여행을 떠날 수 있다니!!!



물이 무섭다 불이 더 무섭다 쓸데없는 말을 할 때가 있다. 자연은 평소에는 그 무서움과 거대함을 드러내지 않는다. 과해졌을 때 그것들의 기운은 걷잡을 수 없게 커진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도 저지할 수도 없다. 해녀들은 바다에서 먹을 것을 얻으며 바다 용왕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다. 가죽을 빼앗겨 뭍에서 아이의 엄마가 되었지만 결국 바다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바다표범 셀키가 있다. 바다 저 깊은 곳, 바다 저 먼 곳은 인간에게 미지의 영역이다. 『난 커서 바다표범이 될 거야』 『물개 할망』 『시간 상자』는 신화로, 상상의 생물로, 인간 발명품인 사진기로 이 광활한 미지의 세계를 더듬으며 가늠하고자 하는 인간의 호기심을 멋진 그림과 함께 보여주는 그림책이다. 각기 다르게 표현된 바다를 감상하는 것은 즐거운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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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셀키(Selkie):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노던 제도, 셰틀랜드 제도, 오크니 제도, 페로 제도, 아이슬란드 전설에 등장하는 바다표범의 요정. 평소에는 바다표범의 모습으로 다니다가 바다 위로 올라올 때는 가죽을 벗고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이 때 그 가죽옷을 몰래 빼앗으면 셀키는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옷을 가진 자와 결혼하게 된다. 인간과 셀키 사이의 아이는 손에 물갈퀴와 비슷한 흔적이 있다고도 전해지며, 실제 셀키의 후손이라 자처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셀키일 가능성이 있는, 일정한 크기 이상의 바다표범은 잡지 않는다고 한다.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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