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유명한 드라마가 나오더라도 잘 찾아보지 않는다. 흥미가 없으면서도 한 번 보기 시작하면 잘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가 종영한 지 1년 만에 추천을 해준 형이 있다. 적어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드라마란이유다.
많은 아픔들을 안고 살아가는 인생이 나오지만 역시 주연 둘을 주목하게 된다. 지안과 동훈.
먼저 동훈을 보면 대기업의 부장이다. 아들을 유학 보낸 가장이다. 어머니께 집을 마련해주어 형과 동생도 거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른바 능력자다. 애물단지처럼 나오지만 언제든 동생을, 형을 위해서 울고 웃고 화내는 형제가 있다. 동네에서 죽고 못 사는 친한 친구들이 넘친다. 절에 들어갔지만 언제든 마음을 나누는 죽마고우도 있다. 함부로 우리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런 사람을 부러워하기 십상이다.
이런 동훈의 말들에서는 삶의 공허가 느껴진다.
누가 날 알아. 나도 걜 좀 알 것 같고. 좋아? 슬퍼. 날 아는 게, 슬퍼.
많은 사람들은 인정받고 싶고, 누가 날 알아주길 바라며 살아간다. 그러나 동훈의 말에서는 부장이건, 가장이건, 형제건, 친구건 내가 무엇이건 간에 나를 아는 게 슬프다. 인정받고자 살아가는 게 아니다.
내가 상처 받는 걸 아는 사람, 불편해. 보기 싫어.
자기가 모욕을 당했어도 차라리 자기 자신이 몰랐다면, 알게 해 주기도 원치 않는다.
아무도 모르면, 아무 일도 아니야.
자신이 얼마나 공허한 사람인지 조차도 아무도 모른다면, 동훈은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사람으로, 그저 살아갈 것이다. 포장하고 덮어버린 고독한 공허함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다. 어쩌면 새어 나오지만 누구도 그 공허함을 달래거나 위로할 수도, 아는 척 조차도 할 수 없는지 모르겠다. 지안 외에는.
지안의 아픔은 그 누구도 쉽게 겪을 수 없는 상처다. 부모가 어린 지안에게 빚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갓 중학생이 된 지안은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는 삶을 산다. 말도 못 하고 들을 수도 없는 할머니를 모시기까지 한다. 심지어 빚 독촉을 하며 장애가 있는 할머니를 폭행하는 빚쟁이의 횡포에 중학생 지안은 살인을 하기에 이른다. 이토록이나 피해만을 입어왔지만, 지안은 피해자로서의 삶이 아닌 가해자로써의 삶을 산다. 사회의 일원이 되기엔 부적격 판정을 받아버린 것이다. 누굴 원망해야 할까. 그저 받아들이고 억척의 삶을 살아간다.
"아무도 모르면, 아무 일도 아니야."라는 동훈의 말에
그러면 누가 알 때까지 무서울 텐데. 누가 알까... 또 누가 알까. 만나는 사람마다 또 이 사람은 언제 알게 될까. 혹시 벌써 알고 있나. 어쩔 땐 이렇게 평생 불안하게 사느니 그냥 세상 사람 다 알게 광화문 전광판에 떴으면 좋겠던데.
어린 나이에 겪은 상처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내 돌아서 버리는 사람들을 겪어왔다. 아마도 이런 관계의 절단이 지안을 고독으로 몰고 갔을 것이다.
모른 척해줄게.
서로 다른 삶을 살지만 같은 고독의 삶을 산다. 지안은 지안대로 상처를 들키기 싫다. 동훈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어쩌면 누구보다도 서로를 이해하는 삶이다. 경계의 선상을 누가 넘어주기 바라지는 않았을까. 이 고독을 달래줄 누군가 필요하진 않았을까.
그렇다고 준비되지 않은 자신의 삶에 누군가가 함부로 들어오는 것은 폭력이다. 이들 역시 서로 간에 호의를 베풀고 도움을 주지만 이따금 경계를 강화하기도 한다. 누가 날 아는 것이 싫은 동훈과 누가 날 알 때마다 홀로 남겨지는 지안의 말들에서 잘 느껴진다. 그럼에도 위에서 말한, 경계를 허물고 고독을 달래줄 누군가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계속해서 든다.
나의 상처가 치부가 되지만 않는다면 괜찮지 않을까. 많이도 안 바란다. 그저 이해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줄 수 있는 존재라면 괜찮지 않을까. 괜찮다는 것을 넘어 사람 사는 세상에서 꼭 필요한 것은 아닐까. 동훈에게 지안이가, 지안에게 동훈이 서로를 이해하여 그 경계를 허물었을 때 이들은 비로소 고독에서 벗어난다.
인간이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렇게 무리와 공동체가 생겨난다. 그 안에서 내가 갖고 있는 상처는 위로받을 수 있을까. 상대가 가진 상처를 나는 위로할 수 있을까. 얽히고설킨 관계망 안에서 수많은 지안이들은 과연 위로를 받으며 살아갈까. 안타깝게도 극에서든 현실에서든 상처라는 것은 쉽게 용서받지 못한다. 나도 모르게 용서라는 단어를 썼다. 그만큼이나 상처는 잘못이 되어버렸다. 감추기에 급급한 치부가 되어버렸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위로가 되기 위해선 서로를 알아야 한다. 뭣도 모르고 함부로 말해선 위로가 될 수 없다. 상세한 정보를 아는 것보다 깊이 있게 안다는 개념이 생겨야 한다. 함부로 서로의 삶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안다는 그러한 개념이 말이다. 그렇다면 상대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상관도 없다. 서로는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을 티 내려하지 않았다. 개념을 정리하다 보니 한 단어로 truelove를 말하려는 것 같다.
서두에 이 드라마를 추천받은 이유가 바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제시해준다는 이유에서였다. 뻔한 결말이지만 그래서 더 면밀히 살펴보는 truelove가 아닐까 싶다. 상처를 위로하는 진실한 사랑, 깊이 있는 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