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도 은혜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십수 년째 잘 믿으며, 교회에서의 사역도 기쁨으로 감당하고 있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살롱 성경 스터디 중 성찬식
교회도 벌써, 스스로의 신앙을 가지고 다닌 지 15년이 넘었다. 뿐만 아니라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그저' 다닌 것만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 역할을 맡으며 잘 수행해왔다. 어떠한 분야든 15년의 활동이면 나름 많이 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잘 믿으면 은혜가 있고, 또 그 은혜의 결과가 부(富)인 것처럼 설파하는 교회, 그리고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 등을 말이다.
은혜라는 단어는 생각보다 어려운 개념이다. 교회에서야 익숙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쓰일 일도 별로 없다. 대가 없이 베푼다는 것 자체가 흔히 발생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은혜라는 말이 익숙하다면 '은혜 갚은 까치'라는 구전설화 덕분일까.
설화를 통해 은혜의 개념에 접근해보자. 선비는 구렁이에게 잡아먹히려는 까치를 구해준다. 그야말로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행위다. 까치는 선비 자신이 똑같은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 동일한 도움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구렁이는 육식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까치가 구렁이에게 잡아 먹히는 것은 선과 악을 떠난 문제다. 내가 선을 행했다는 자부심마저 가질 수 있는 자기만족의 행동도 아니었다.
결말에 까치가 은혜를 갚는다는 내용을 담은 것은 그만큼 베푸는 삶에 대한 타당성을 확보한 것이겠지만, 은혜 자체로의 의미는 퇴색하게 된다. 은혜는, 값을 지불해야만 상응하는 무언가를 얻게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낯설기만 하다. 은혜라는 속성을 파악하다 보면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는- 경제적 구조가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구조를 통하여 우리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물의 의미를 파악하게 된다.
은혜 = 값 없이 주는 선물
다시 첫 질문이다. 가난도 은혜가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신앙의 형태에서 퇴색되어버리는 것이 많다. 가령, 경제를 얘기하면 신앙적이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일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도와 정답에서 알아봤듯이 성경은 경제적 구조를 제시하기도 한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의 정치범 처형 도구인 십자가형을 당했으니, 정치의 끝판왕 격인 것이다. 신앙적 언어가 신비적이고 구별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그렇다면 가난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가난 역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일까? 가난하다를 포털사이트에 검색하면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하여 몸과 마음이 괴로운 상태에 있다.'로 사전적 의미가 나온다.
괴로운 상태.
고난 역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일까? 현실적인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각하지 못한 채 엄청난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된다. 가난과 고난 등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는 고백이다. 하지만 주의할 것이 있다. 반드시 주의할 것은, 가난은 주어지는 것으로써가 아니라 회복되어야 할 대상으로써의 계획인 것이다. 회복의 방식에서 은혜가 드러난다. 쉽게 적용되는 사례는 없을까?
교회를 오래 다녀도 안식에 대한 개념과 희년에 대한 개념은 듣기 어렵다. 안식일은 일주일에 하루, 안식년은 7년에 1년, 희년은 안식년의 7회째 돌아오는 해이다. 즉, 희년은 안식년이 일곱 번 돌아오는 49년째 되는 해인 것이다. 다만, 동양의 계산법으로는 50년 주기로 보면 된다. 은혜와 가난에서 희년을 언급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희년에 발생하는 '사건'에 주목해야 하기 때문이다. 희년에 와서는 모든 종과 노예가 자유를 얻는다. 해방이 된다. 빚이 탕감된다. 가난의 되물림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엔 어떠한 대가가 없는 은혜를 닮은 구석이 있다.
은혜를 받으면 감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가난을 회복하는 일임에도 감사할 것인가? 어쩌면 나의 재산이 흩어지는 일이 될 수 있는 것임에도? 그럼에도 분명 은혜에 감사를 외칠 수 있겠는가?
은혜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가난과 고난을 회복할 도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