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죄와 저항

by 김작은
기독교 신앙인들이 갖는 고민 중에 한 가지가 '정죄'이다. 쉽게는, '남을 미워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는 이들이 많다.


출처: @saint_mooon 이태원과 경리단길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통해 정죄하지 말 것을 배운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정죄하고, 그러므로 끊임없이 죄책감을 갖는다. 여기에서 정죄한다는 뜻은 죄를 깨끗하게 정화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죄를 단정 짓는 것이다. 사회적인 합의에 의해 도출된 죄는 규정하더라도 기독교의 근본적 죄에 대하여는 규정이 가능한가?

몇 가지 질문을 이어서 던져보고자 한다.


Q. 70억 인구에게 동일한 죄를, 즉 보편적인 죄를 규정짓는 것이 가능할까?

- 기독교 내에서 더 극심하게 왈가왈부하는 죄들에 대하여 세계는 다르게 반응한다. 동성애, 낙태 등의 예를 들어도 나라든, 교단이든 모두 다르게 받아들인다. 지극히 당연하고 보편적으로 적용될 것 같은 살인마저도 전쟁에서 총을 쏘는 군인들에게는 죄로 규정되지 않는다.


Q. 인간은 죄에 대하여 심판자로 설 수 있는가?

- 국가에서는 법이 있고, 더 작은 단위의 집단에서도 법들이 존재하여 판단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난민을 대입하면 달라진다. 그들에게 행한 범죄는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지만 틀을 벗어난 사람들에 대하여는 죄가 적용되지 않으며, 심판할 수 있는 근거 역시 제시하지 않는다. 따라서 심판자로 설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된다.


Q. 그렇다면 를 규정짓는 것은 누구의 역할일까? 어쩌면 정죄 자체가 불가능한 일은 아닐까? 신을 인정하는 신앙인들이 신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일이 아닐까?


질문을 통해 정죄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할 거리가 주어진다. 규정의 문제를 떠난 태도의 문제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전에는 내가 행한 타인에 대한 정죄로 인하여 다시 스스로를 정죄하여 죄책감을 가졌다면, 이제는 신적인 권위를 거머쥐고 심판의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다면 정말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일들에 대하여는 침묵해야 하는 것인가? 정의는 어떻게 세울 수 있는 것인가? 필연적인 고민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법의 폭력성을 알면서도 최소한의 사회적 정의를 위하여 우리는 법을 지키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합의한 범죄를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

그런데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면서도 법의 심판을 받지 않거나 심지어는 법의 잣대를 움직이게 만드는 사회적 강자들이 있다. 법의 힘을 웃도는 불의한 권력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들에 대하여는 정의 실현이 가능한 것일까? 그들로 인하여 피해를 입거나 피해에 노출된 사람들 즉, 사회적 약자들은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을까?


이미 불의로 규정하는 순간, 정죄와도 닮았지만 이것을 저항이라고 부른다. 사회적 구조로 강자와 약자가 나뉘고 약자의 입장에서 스스로를 지키려는 수단.
저항의 종류도 매우 다양하게 드러난다. 작게는 어른의 말에 반항하는 아이가 있을 수 있다. 조금 더 크게는 노사 간의 파업이 있을 수도 있고, 더욱 크게는 제국주의에 저항했던 식민 국가의 독립투사들이 있을 것이다. 저항의 방법으로는 논의할 것이 수없이 많고 입장 차이가 존재하겠지만 여기에선 방법을 보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또 한 번 정리해보자면, 정죄는 강자의 입장에서 하는 행동이고 저항은 약자의 입장에서 하는 행동으로, 입장의 차이를 보려는 것이다.


약자가 강자에 귀속되는 것이 당연하며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시대와 사회도 있지만, 신앙을 기초로 성경을 근거하여 정의로운 사회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한다. 하나님은 대체 정의를 어떻게 이루시겠다고 하시는 것인가? 성경을 자세히는 모르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조차 세계 4대 성인으로 존경하는 예수의 삶을 통해 성경을 요약해보자. 약자를 보호하고 위로하며, 강자들로 하여금 지극히 작은 자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피해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위해 탄원하시는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통해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강자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 주변을 돌보지 않는 각자도생의 논리는 성경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항은 정의를 이루기 위한 최소한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중요한 대목은 다음에 있다. 사회적 구조로 나뉜 강자와 약자는 전복이 어렵다. 그래서 약자는 군집하게 된다. 강자와 힘의 균형을 맞춘다. 두려운 것은, 군집으로 인하여 갖게 되는 힘이다. 저항을 위한 약자의 힘에서 다시금 강자가 되는 것이다. 다수가 되어 소수를 매도할 수 있게 된다. 프레임이 씌워진다. 저항세력에서 정죄 세력으로 변모한다.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다. 그래서 상황을 직시하고 관철할 수 있는 시력이 필요하다. 한순간에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면서 계속 생각하고 봐야 할 것이다. 성경이 그 좋은 교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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