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옳고 그름이 궁금하다. 각기 다른 신앙이 있고, 같은 신앙에서도 추구하는 바가 전혀 다르기도 하다. 그럼에도 전 우주를 아우르는 보편적 진리라는 것이 존재할까?
필자가 그린 예수
기독교는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역사적 인물을 근거하여 진리를 전한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의 기본 내용은 이런 것이다.
① 세상의 창조주는 하나님이다. ② 피조물인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고, 창조주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며 죄를 짓는다. ③ 그리고 하나님은 삼위일체로서 아들이신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와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는 죽음으로 우리의 죄를 멸하셨다. ④ 예수는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시어 하나님 곁으로 돌아가고, 성령 하나님을 이 땅 가운데 보내어 우리를 하나님 말씀으로 인도하신다.
우리는 이 내용을 복음(좋은 소식)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십자가 속죄 복음인 것이다. 어떤가? 누가 봐도 보편타당한 신의 섭리라고 느낄 수 있을까? 누가 봐도 감동이 전해지며 누가 봐도 믿을 수밖에 없는 진리라고 느껴지는가? 우리의 느낌은 관계없이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인 것인가?
성경 자체를 요약한다는 것에서 이미 한계가 발생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위의 네 가지 원리를 조금은 이해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보편이라는 단어에 내포된 폭력성도 함께 봐야만 할 것이다.
창조는 나 자신과 더불어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과 누릴 수 있는 모든 만물을 창조했다는 것 자체로 사랑이 내포되어 있다. 그중 인간에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자유의지가 주어진다. 자유의지가 퇴색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은 언제나 피조물의 역할이었다. 그러한 모습은 바로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극으로 치닫게 된다. 선악을 알게 되면 무엇을 할 것인가?
앞서 정죄와 저항이라는 글에서 정죄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사유한 바 있다. 죄를 단정 짓는 불가능한 행위를 하면서 드러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분리이다. 구별이다. 배척이다. '거룩과 구별'이라는 주제를 따로 빼서 쓸 예정이니 일단 넘어가겠다. 하여튼 선악은 곧 배척이라는 폭력으로 나타난다. 아담은 하와를, 하와는 뱀을 탓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폭력의 역사는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것으로 글의 후반부에서 다시 다뤄보도록 하자.
우리는 이러한 죄로 인하여 창조주를 벗어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신이 직접 성육신으로 이 땅에 오게 되는데 이는 아이러니의 극단적 사례가 되고 만다. 두 성질이 한 번에 있는 것이 가능한가 와 불가능한가 즉, 예수는 완전한 인간인가 혹은 완전한 신인가 하는 것이다. 이 논쟁은 아직도 이어져온다. 논쟁의 열기를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예수의 생애와 고난 때문이기도 하다.
성육신으로 오신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 이러한 예수의 사랑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믿음의 뿌리를 내리게 한다. 사실 십자가 속죄의 복음만을 놓고 본다면 예수의 부활과 그 간의 성경이 어떠한 쓸모가 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모든 성경이 예수를 메시아라고 조명하는 도구이며, 부활은 결국 신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면, 그저 그냥 믿어지는 이들에게는 성경은 쓸모가 없는 것인가. 자문자답을 하자면 그렇진 않을 것이다.
신의 창조 스토리나, 신의 인간을 향한 러브스토리는 진리인가? 예수가 이토록 명백한 사랑으로 구원의 은혜를 마구 뿌린다면 피조물인 인간들은 어째서 믿지 않는 것일까? 어째서 예수는 고난을 받았을까? 어째서 예수는 폭력을 당했을까?
질문에 의거하여 폭력에 대하여 두 가지로 나눠서 살펴보자.
일단 진리를 거머쥔 자의 폭력이다. 진리란 곧 정답이다. 신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정답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답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정답을 알려준다. 처음엔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가간다. 하지만, 전달받는 이들이 거부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틀린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보편 진리는 즉, 틀린 사람들을 만들어낸다.
학창 시절만 해도 시험 문제에서 틀리거나 답을 맞히지 못하면 매를 맞았다. 사랑의 매라고도 부르며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도구였던 이 '매'는 교조적인 형태의 교육환경이 낳은 폭력이었다. 교육을 전하는 자가 수직 구조에서 우위를 점한 것이다. 교육자는 보편 진리를 거머쥔 자이며 높은 곳을 차지한다. 이러한 속성으로 하부구조의 사람들 즉, 틀린 사람들이 생겨나고 그들은 이미 배척된 상태에서 배움을 시작한다.
이러한 사실들이 진리를 거머쥔 자로서 불편한가? 그러나 불편해할 것은 조금도 없다. 앞서 살펴본 바 진리의 속성은 사랑이며 진리는 배척하지 않는다. 거머쥔 자의 폭력이 있을 뿐이다.
요즘의 대안교육 형태는 어떠한가? 가르침보다는 배움에 초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토론, 토의가 이루어지고 능동적인 생각을 하게 한다. 능동적인 생각. 그것이 바로 종교개혁을 이루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기 쉽게 만들고 능동적으로 예배할 수 있게끔 만들던 목적 아니던가.
그럼에도 우리는 알고 있다. 경험과 축적된 사랑의 지식들은 존경받아야 마땅하고 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을. 그러니까, 가르침의 형태와 배움의 형태가 조화로운 상태의 교육이 수직구조를 벗어나며 존중과 존경이 살아나는 이상적인 모습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폭력을 알아보자.
그렇다면 이 진리이신 예수는 왜 폭력을 당하여야만 했나. 다시 정리하자면 첫째는 진리(진리를 거머쥔 자들)가 가하는 폭력이었고, 둘째는 진리가 당하는 폭력이다.
성경은 예수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한다.(요한복음 14장 6절) 그런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보자니 어처구니가 없다. 수 천년을 이어오던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백성들에게 잘못된 것들을 지적한다. 예수 당시의 세상을 거의 집권하던 로마제국에게 잘못된 것들을 지적한다. 앞서 살폈던 바 진리가 폭력으로 다가오는 것 같지만 이윽고 예수가 폭력을 당한다. 유대인들에게, 로마인들에게. 즉, 우리에게.
오직 진리이신 예수는 진리를 폭력적으로 전파하지 않았다. 오직 진리대로 사랑을 통하여 전하였다. 어떠한 방식인가? 그들과 함께 했다. 진리를 거머쥐지 못하여 배척받는 수많은 이들과 함께 했다. 그럼으로써 진리를 거머쥐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불편함을 선사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진리를 선사했다. 그러나 이미 자신들이 진리인 이상,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은 없다는 식으로 진리를 구타한다. 급기야 죽이고 만다.
이렇게 끝나고 만다면 진리는 그저 폭력을 당하는 존재인 것인가? 그렇지가 않다. 결국 부활이 갖는 의미는 참진리의 승리 선언이고, 끝까지 폭력적이지 않는 증거이며, 이는 또한 산 소망이 된다.
진리를 믿는 우리는 부활 소망을 거머쥔 자들이 되었다.
누구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닌, 비폭력적인 참 승리와 소망을 거머쥔 자들.
우리는 십자가 속죄 복음의 진리를 통하여 '사랑'을 깨닫게 되고 궁금증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예수가 이 땅에 내려와 전했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는 또 다른 진리는 무엇일까. 바로 그 점이 성경을 읽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며, 성경을 통하여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갖는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게 한다.
너무나 방대한 역사적 일들과 사유의 일들을 한 가지 길로 끌고 오며 축약하느라 오히려 빈약해진 논리는 앞으로의 글들에서 계속 풀어가고 싶다. 다만, 단 한 가지 진리가 내포한 명확한 개념은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창조가 있고, 신의 스토리가 있고, 인간의 스토리가 생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보편적 진리를 통해 사랑과 대척한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진리는 스토리를 선사한다. 스토리는 도착점이 아닌 방향을 알려준다. 계속해서 걸어가 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