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공부할 때 지식으로만 접근하지 말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성경은 믿음을 가지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공부해서 지식이 쌓인다면 이성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믿음이 생기게 된다. 어쩌다 지식과 믿음과 이성과 성경 모두에서 괴리가 발생하게 되었을까.
이번 글에서는 신학의 깊이 있는 탐구라기보다는 필요성에 대해 말해보고 싶다. 성경을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과 나눔을 하다가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구약에 대해 살펴보며 구약 39권을 모두 배열한 뒤 역사서, 예언서, 시가서 등을 분류하여 묶어냈다. 다 같이 진행했기에 이 작업을 하는 데에도 시간이 조금 흘렀고 몇 권만 예를 들어 의미를 살펴보았다. 그러고 나서 필자가 아래의 질문을 던져보았다.
Q. 이렇게 공부를 해서 구약의 구조를 알고 어떤 의미인지 대략적으로만 살펴보았는데 혹시 이러한 성경이 우리의 삶에,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으며 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여러 가지 답변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들고 솔직한 답변을 소개한다.
A. 저는 구약 성경이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다시 오실 예수님도 기대하며 바라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는 것은 어쩌면 필요가 없다고도 생각합니다.
위 대답에 대한 오해가 없길 바란다. 대답을 한 친구도 성경이 궁금하고 더 자세히 알기를 바라고 있어서 모임에 참여했다. 가슴으로 예수를 믿어 왔고 수년간 교회 내에서 성경을 접해 왔다. 그러나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칠 때는 좋은 가르침 속에서도 실제적인 삶의 중요성을 가리거나 신비주의가 만연한 것도 사실이다.
삶은 치열하다. '믿으면 복이 와요' 나 '고난의 의미를 발견하고 감사로 견디면 반드시 복이 와요' 같은 조건부 복에 대한 가르침은 위로받을 수 있는 부분도 분명 존재하겠지만, 아무래도 현실과는 괴리가 있다. 지금의 힘든 삶은 버텨야만 하고 나중에 다가올 영광만을 바라보게 한다. 그러다가 현실을 버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면 낙오자가 된다.
그렇다면 성경은 정말 우리의 삶과 연관이 없을까?
이를테면 거짓말하지 말라던가, 살인하지 말라는 윤리적 가르침(성경에 나오는 십계명에 포함된 내용) 마저도 상황에 따라 다르게 작용해서 성경의 문자적 권위는 떨어진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가르침은 성경 외에 많은 곳에서 등장한다.
기적들에 대한 신비로운 내용은 하나님의 권위와 전능하심을 드러내는 도구일 뿐일까?
현시대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기적들을 볼 수 없으니 다른 방식의 기적들을 얘기하곤 한다. 기도하면 이루어지는 '수많은 것들' 말이다. 늘 딜레마에 빠진다. 상황을 가정하자면, 한 회사에서 한 명의 신입사원을 모집한다고 하자. 이랬을 때 지원자 중에 두 명이서 동일한 믿음과 소망으로 하나님께 취업에 대한 기도를 드린다면, 과연 누구의 기도를 들으시겠는가.
우리는 브루스 올마이티라는 영화를 통해 기도제목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파멸 비슷한 것을 엿봤다. 어쩌면 우리는 기도가 지니의 램프와도 같이 소원성취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언서들은 특히, 요한계시록은 숫자에 얽매여서 엉뚱한 해석을 내놓기 마련이다. 그런 곳들은 이단 아니냐고 반론을 제기한다면, 안타깝게도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 측 교단의 교회에서나 기독교 한국 침례회 교단의 교회의 성경 강해 설교에서 비일비재하게 들을 수 있다. 필자가 속해 있던 교회들이다.
교회를 다니며 공동체를 이룬다면 분명 그 안에서 선순환을 발견하게 됨에도 이론적 측면은 이상하리만치 선순환을 따라가지 못한다. 즉, 공동체에서 소통하고 배려하는 행동 양식들은 생기면서도 교리는 딱딱하게 굳어지는 현상이다. 그렇게 쌓인 성경에 대한 지식은 현실과 괴리가 발생하고, 공부할 때 지식으로만 접근하지 말라는 충고까지 나오게 만든다. 신학은 성경의 해석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이 세운 믿음의 근거로써 정신승리의 도구가 된다. 그럴 때마다 나도 성경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고, 함께 공부하던 친구의 말이 확 다가오게 됐던 것이다.
현실에 대한 올바른 직시가 있을 때, 그리고 내가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할 때 우리는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신학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신학을 통해 성경에 대한 올바른 파악을 위해 그 당시의 현실을 직시하고, 적용되는 말씀들을 바라본다. 그렇게 유동적으로 살아있는 말씀을 깨닫고 현재에 적용한다.
추상적인 언어였으니 구체적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예수께서 당시에 이혼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신학과 신앙에 괴리가 있을 땐 이 말씀은 아무리 가정폭력이 있는 가정이라도 이혼하지 말아야 한다고 적용된다.
그 당시의 현실을 보자. 이혼을 하면 남성에겐 피해가 없다. 여성은 모든 재산을 잃고 경제적 자립도 힘들어 결국 노예나 창녀로 생을 이어가게 된다. 그렇다면 이혼하지 말라는 말씀엔 사랑이 담겨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폭력이 있는 가정에 예수의 말씀 따라서 이혼하지 말라고 전한다면, 그것은 예수의 사랑은 온데간데없는 2차 폭력밖에 안되지 않을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이 세상을 살아가며 진화든 창조든 이 세계의 탄생을 의심할 수가 없다. 관념론자 같으면서도 분명한 나의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창조가 이루어졌고, 창조와 의미에 대해 가르치는 것들을 탐구한다. 자아실현을 하고 싶다. 물론 나는 삶의 무의미함을 더 먼저 느꼈고 그로 인한 진정한 의미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것이 나의 바람이기에 여러 사유의 세계를 여행하면서 현실 감각을 유지한다. 그러다가 발견한 성경은 알아갈수록 흥미로왔다. 한 문단에 바라는 것을 응축하느라 지지부진한 부연설명이 되었지만, 결국 나는 성경으로 드러나는 신이 현실과 어우러지는 것을 바란다.
신앙을 갖게 만드는 사랑, 그것을 온전히 알기 위해 신학을 한다.
따라서 성서를 비판적으로 읽는 것은 어쩌면 필수 불가결한 일인 것이다.
결국 신학은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단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고, 사랑으로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이 말씀을 현실에서 제대로 적용하기 위한 도구로 필요한 것이 아닐까. 옳음을 점령하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