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애도'가 가장 잘 나온 구절이 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로마서에 나오는 이 말씀은 흔히 말하는 애도와는 뭔가 달라 보인다. 보통 죽음이나 상실에 대한 공감으로 사용되는 말임에도 성경은 애도를 함께 웃고, 함께 우는 것으로 이끌고 있다.
손미 시인의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시집을 읽으며 제주 4.3 사건을 깊이 생각합니다.
가끔 분노에 차서 글을 쓰는 경우가 있다. 특히 공적인 자리에서의 설교나 스터디 자리에서 나누는 권위자의 말들 때문에 그럴 경우가 많다. 이번에도 역시, 늘 내재했던 분노가 원동력이 되었기에 조심스럽게 써보려 노력한다.
분노의 대상이 됐던 설교 내용은 아래와 같다.
현재 자신의 삶에 감사하라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전혀 분노할 것이 없는 내용이다. 그런데 감사가 어디로부터 나오는지가 의아하다. 힘든 사람들, 아픈 사람들, 상처 입은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국가로부터 핍박을 받는 사람들, 자유를 침해당하는 사람들, 특히 종교(기독교) 생활을 마음껏 영위할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그들에 비해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언뜻 타당해 보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전혀 동의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목사님이나 전도사님, 교회 선생님의 말씀 따라 그들을 생각한다면...... 감사보다는 아픔이 더 컸다. 그러니까 누구나 보편타당하게 감사로 삼을 수 있는 근거가 아니라고 느꼈다.
또한 필자의 개인적인 삶과도 연관되어 있다. 나름의 불행한 일들도 있고, 나름의 힘든 일들도 있다. 굳이 경제적 비교를 하자면 저소득층 가정에서 자랐다. 나 스스로의 개인에서 더 확대해보자면 누구나 힘든 것들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고소득층의 자녀가 나보다 나은 삶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언급됐던 저들의 삶보다 내가 나은 삶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비교급의 삶이 아니기에 저들의 삶에 비해서 감사하다고 느낄 수도 없었다.
이렇듯 교회를 다니다 보면 기쁨과 감사라는 대목들이 강조될 때를 보곤 한다. 그것은 아마도 데살로니가전서 말씀 때문에 더 극명히 드러날 것이다. 교회를 안 다니더라도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구절이 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말씀을 인용하여 기쁨도 강제적 명령으로 듣는다. 그로 인해 현재 기쁘지 않음에도 기뻐해야 한다고 알게 된다. 기쁨을 선포하면 현재의 상황과 상관없이 기쁨이 찾아온다고도 들은 적이 있다.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한 마이클 A. 싱어가 쓴 [상처 받지 않는 영혼]에서도 말하지만, 자아를 타자화시켜 고통을 겪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참자아, 그것을 깨달으면 고통은 종식된다. 참자아는 고통을 바라보는 존재로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과도 같다. 영은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무한한 기쁨의 세계를 누린다. 그래서일까, 어느 정도 선포하여 얻는 기쁨에도 동의는 하지만 다소 폭력적이고 정신승리적 발언이라는 생각은 떨칠 수 없다.
살전(데살로니가전서 줄임말)은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서 주의 통치가 올 것이라는 소망을 담아 쓴 편지이다. 즉, 살전 당시 유대인들은 식민지 국민인 것이다. 통치자의 명으로 인하여 유대 민족이 몰살까지 당할 수 있는 시대였다. 거기에서 항상 기뻐하라고만 할 수 있을까? 기쁨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남은 핍박당하는데 나는 무사하다면 그것이 기쁨일까?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은 공동체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필자는 서두에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 함께 웃고 함께 우는 것이 '애도'라고 밝혔다. 성경을 보다 보면 애통하는 자의 복도 나온다. 항상 기뻐하라고 하지만 애통과 함께 우는 것을 지향한다. 그렇기에 '항상'이라는 단어에서 모순을 느끼게 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의 '쉬지 말고'와 함께 그것이 말하는 의미를 살펴보자.
'쉬지 말고(= 항상)'가 주는 폭력을 체험한 적이 있는가?
사실 기도를 뺀 채 항상성만 주목한다는 점에서 비약적인 감이 있지만 이 항상성이 갖는 폭력이 교회에 비일비재하다 보니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동시에 기도, 기쁨, 감사에 대해서도 함께 다룰 것이다.
교회를 다니며 하는 '봉사'로는 교사, 리더, 찬양대, 찬양팀, 청소, 주차안내, 식당, 홍보, 음향장비관리, 이웃 선교 등 수많은 종류의 봉사가 있다. 이중에 보수가 주어지는 것들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이 무보수로 봉사한다.
물론 스스로가 기쁨으로 하는 일까지 타인으로서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문제는 봉사를 하다가 중단할 때 생긴다.
"부장 선생님, 다음 달까지 하고 그만 할게요."
라고 한 교사가 말했다고 하자. 당신이 부장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혹은 그 한 교사가 당신이라면 당신은 무슨 말을 들었겠는가? '유 퀴즈 온 더 블럭'이라는 TV 프로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인터뷰한 내용이 감명 깊었다.
"지금 무슨 말을 듣고 싶으세요?"
"'수고했다'요."
부모님들은 자식을 키운 수고, 취준생은 준비하는 수고, 학생은 공부하는 수고 등 삶에서의 애씀을 인정받고 싶어 했다. 그걸 인정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일까?
부장 선생님으로부터 "교회와 학생들을 위해 그동안 애쓰셨습니다. 수고하셨고 감사해요. 언제든 열려 있으니 마음과 여건이 허락될 때 다시 오세요."라는 말을 듣는 게 그리 어려울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봉사와 교회에서 감당하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거나 쉴 때, 그 이유를 대야 하며, 이유를 댄다 하더라도 다시 주의 일에 힘쓸 것을 권면받는다. 심지어 그만두기 위해 솔직한 마음을 숨기게 되고 거짓된 핑계를 대는 경우도 생긴다. 이것이 우리가 겪는 폭력이다.
살전에서는 로마의 통치에서 벗어나 주의 통치를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을 전달하며, 이것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역할로써 감당하는 것이다. 공동체적 역할은 이웃을 향한 사랑을 말한다.
이웃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의 실천은 중단되지 않는다.
로마서와 데살로니가전서는 여기에서 항상성, 기쁨, 기도, 감사 그리고 애도의 가치가 합치된다. 공동체적 기도는 이웃을 위한 기도이자 실천이다.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타인을 인식하는 삶이다. 웃음과 눈물 안에 진정한 기쁨과 감사가 있다. 힘든 삶에서 함께 아파하는 것이 공동체적 기쁨인 것이다.
손미 시인은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라고, 타인을 인식하고 애도하며 사랑으로 살아가야 함을 절실하게 외치는 것만 같다. 우리의 삶은 애도와 감사가 항상, 그리고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