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약속

by 김작은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지만 우리의 삶에는 꼭 고난과 고통이 따른다. 왜 우리는 고난을 겪으면서 살아갈까? 고난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분명한 의미가 담겨있을까?


1497548581737.jpeg 발리에서


고난이라고 한다면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례들을 꼽을 수 있다. 크게는 재난, 재해부터 작게는 통증을 느끼는 것까지. 개인의 사유와 집단의 이데올로기 안이나, 아등바등 살아가는 상황과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까지 '고(苦)'는 빠질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인생은 괴로운 것일까.


얕게나마 알기로는 싯다르타도 인생을 '고'로 여겼고, 따라서 깨달음을 얻어 '고'의 연속 즉, 윤회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쳤다. 윤회 사상 안에 있던 기존 불교의 입장에서는 반항아였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주어진 '고'의 인생을 순순히 인정하며 더 나은 윤회로 갈 것인가, 아니면 아예 '고'의 굴레를 벗어날 것인가.


인생은 왜 괴로울까? 나아가서 신앙인들은 고난의 이유나 의미가 무엇일까를 탐구한다.

고난의 인식은 감각에서부터 시작된다. 고통의 감각을 느끼고 괴로움을 인식하거나 혹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서 괴로움을 인식할 수도 있겠다. 현재 고난을 당했을 때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인식에서의 괴로움을 이기고 싶은 열망이다. 이해라도 해서 괴로움을 벗어나고 싶은 열망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고난의 의미까지 생각하게 된다.


벌써 십 년도 더 됐지만 고등학교 선생님 에피소드를 또 꺼내봐야 할 것 같다. 근현대사 선생님은 그 유명한 최태성 선생님이었다. 그분께 받은 교육은 역사적 이론뿐만이 아니었다. 논리력이나 세상을 보는 관점 등 다양한 영향을 받았다. 미션 스쿨이기에 신앙적 영향도 있었다.

당시에 동남아에 쓰나미가 닥쳐와 백만 인구가 몰살당한 적이 있다. 그 지역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에 벌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던 유명한 목사들이 있었다. 그때 선생님께서 유일하게 화를 내셨던 게 기억난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어떻게 재난에 대해 하나님의 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분노였다. 그리고 우리 또한 제대로 잘 믿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겠냐는 자문이기도 했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하여 우리는 흔히 모든 것을 관장하는 신을 생성한다. 그리고 책임을 돌린다. 어쩌면 추궁하는 것 같기도 하다. 모든 문제는 신한테 달려있다. 고난에 있어서 더욱 그렇다. 그것으로 위로를 받는가 하면 신을 떠나기도 한다. 상황을 직시하지 않고 모든 책임이 주께 있음을 고백하는 이것이 훌륭한 '믿음'이란다. 글쎄. 글쎄올시다.




다시, 상황을 직시하기 위해 인생은 왜 괴로울까?라는 질문으로 돌아오자. 그리고 의미보다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똑같은 태도 같겠지만 한 가지 차이를 둔다. 신비를 벗어나 이성적 태도로, 구조적인 이유를 제대로 살펴봐야겠다.


이러한 시도의 이유는 현재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고난을 직시할 수 없게끔 만드는 구조가 있다. 경제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는 인류가 취할 수 있는 경제체제의 끝에 다다랐다고도 말한다. 베이컨의 [신아틀란티스] 급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폐해를 낱낱이 드러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빈부격차의 심화를 얘기하게 된다. 자본주의 안에서는 '빈(貧)', 혹은 '고'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주석 시진핑은 당 총서기로 선출되었을 때 '중국몽'이라고 하여 중국의 꿈을 제시한 바 있다. 중산층을 최대로 확보하는 '샤오캉'상태를 달성하여 2049년까지 세계 최강국이 되겠다는 꿈이다. 심지어 당월 5일 상하이 국제 수입 박람회에서는 "우리는 대외개방의 조치와 태도를 더 강화하고, 힘을 합쳐 세계의 케이크를 더 키우겠다"면서 "경제 세계화 동력을 더 크게 만들겠다"라고 강조했다.


경제학자들은 중국인들 모두가 중산층이 되려면 지구가 세 개 필요하다고도 말한다. 즉 그만큼의 인구가 밑에서 받쳐줘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잘 살 수 있다는 것이 아님에도 자본주의 구조는 누구나 잘 살 수 있다는 꿈을 심어준다. 따라서 '빈'이나 '고'는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낙오자의 산물이 된다.




이러한 사회에서 1가구당 1 주택이 주어지는 꿈같은 일이 가능할까? 우리나라는 주거권이 그저 자유권 정도로만 보장을 받는다. 프랑스에서는 주거권을 위한 사회주택 마련의 제도 등 국민의 기본권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다.
[세계 인권선언 제25조 제1항에서는 ‘모든 사람은 식량, 의복, 주택, 의료, 필수적인 사회 역무를 포함하여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녕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여 주거권을 ‘적절한 생활수준을 향유할 권리’의 한 대상으로 보고 있다.] (출처: 권세훈, 프랑스의 주거정책과 주거권)


주택에 대한 기본권이 보장받는 사회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고난이 사라질 수 있을까? 자본가들의 눈에는 과연 기본권이나 고난이 들어오게 될까? 필자는 심히 회의적이긴 하다.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고난은 누구나 회피하고 싶어 한다. 가장 회피하고 싶은 것은 죽음일 것이다. 교회에서 한 동생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게 되는 얘기를 나누게 됐다. 임종이 다가오자 요양원을 알아보고 집 옆의 요양원에 모셨다고 한다. 이유인즉슨, 집에서 돌아가시면 경찰 조사도 받게 되고 여러 가지로 귀찮은 일이 발생하여 바로 옆이지만, 요양원에 모셨다고 한다.


시설의 혜택은 분명 자유롭게 누릴 수 있고 좋은 것이다. 하지만 이로써 우리는 가족의 죽음에 대하여 눈을 감게 된다. 예전에는 집에서 가족의 임종을 지켜보며 고난에 대면했지만 이제는 고난으로부터 한층 보호막이 생긴 것이다. 고난을 직시하지 못한다면, 나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에 대하여 혹은 모든 고난에 있어서 다시 그 의미를 따져 묻게 될 것이다.




고난을 있는 그대로 직면한 사람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욥.

고난에 처한 욥은 당대의 의인이며 신실한 믿음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가 고난을 받는다. 그리고 하나님께 따진다. 나를 보라고. 나처럼 잘 믿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이 다시 등장하여 욥에게 말한다. 그래 네 말이 맞다고.

욥은 믿음으로 인내한 것을 인정받지 않았다. 끝까지 따졌던 것을 인정받았다. 하나님은, 욥에게 와서 제대로 믿으라며 훈수 뒀던 친구들의 죄를 위하여 욥한테 제사를 드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은 우리에게 무얼 말하고 싶었을까. 전능을 얘기하면서 만능자로 만들어놓는 우리들에게 따지고 싶진 않았을까? 우리를 위해 약속(제약)을 하여 스스로 제한을 둬버린 자신의 처지를 말이다. 그 처지는 사랑에서 비롯됨을 말이다.


신은 우리와 약속을 하며 고난의 처지를 선택했다.


우리의 신앙에서 안타까운 것은 고난에 처한 우리에게 다가온 신의 모습이 삭제된다는 점이다. 함께 고난에 처한 신은 외면당하기 마련이다. 그저 이 고난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며 고난을 이겨낸 영광만을 바라보거나, 고난의 타당성을 따지다가 돌아서는 사람들. 예수의 고난은 예수의 고난, 내 고난은 내 고난일 뿐.

그러나 우리의 고난에 대한 신의 태도가 달랐던 것을 안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십시오."

(쉬운 성경 로마서 12장 15절)


[함께]라는 신의 약속을 우리는 감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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