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에 이견이 많지 않은 것 같다.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고독하고, 그럼에도 혼자라고 느낄 때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찾아온다.
"너희가 고독과 외로움의 차이를 아느냐! 외로움이란 내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느껴지는 쓸쓸한 감정이고, 고독이란 설령! 주변에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내 안에 나의 자아로만 가득 차서 타인이 들어올 수 없음에 느끼는, 바로 그러한 쓸쓸함이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오셀로가 된 것처럼, 사랑에 빠져버린 그윽한 눈빛을 품고 질투의 화신같이 엄중하게 말씀하셨다. 덕분에 내용까지 세세하게 기억난다.
외부로부터의 단절이든, 내부로부터의 단절이든 외롭고 쓸쓸한 것은 둘 다 똑같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선생님이 정의하신 고독이 와 닿게 됐다. 어떤 무리와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함께 있지만 소외감이 들 때가 있다. 의도적인 따돌림이 없을지라도 대화의 주제, 경험, 방향 등에서 차이가 날 때 가능한 경험이다. 학교, 회사, 심지어 연애나 부부관계에서도 가능한 일상적인 경험이다. 가끔 어디에서나 혼자라고 느끼는 감정이다.
무리 안에서 혼자라고 느낀다면 나는 과연 타인과 함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우리는 타인과 제대로 된 만남을 갖는 것조차 가능할지 의문이 생긴다.
"만일 우리가 주관을 제거해버리면 공간과 시간도 사라질 것이다."
"현상으로서 공간과 시간은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없고 단지 우리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즉, 우리가 보고 느끼며 지각하는 모든 현상들은 나의 뇌에서 벌어지는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칸트는 완전한 허상 세계만을 말하지 않고 본체나 이상적 형체가 따로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관념론에 따른다면 눈앞에 있는 대상을 만나고도, 만났다고 확신할 수가 없게 된다. 어쩌면 진정한 타인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앞에 서있는 당신은 내 인식 체계가 만들어낸 관념적 존재일 뿐, 당신의 진정한 모습을 나는 볼 수 없으며 만날 수 없다. 필연적으로 고독한 존재가 된다. 각박해 보이지만 실제로 같은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도 다르게 파악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관념론적 주장은 경험적 토대로 타당성을 갖게 된다.
고독과 만남이라는 주제를 가장 명확하고 아름답게 그려낸 작품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이다.
한 비행기 조종사가 있다. 그는 어렸을 때 코끼리를 먹은 보아뱀을 그리고는 어른들에게 보여줬다. 그러나 모두들 모자라고만 바라봤다. 그는 아무도 몰라보는 그림을 더 이상 보여주지 않았다. 성장 후 조종사가 되어서 아주 멀리 있는 사막에 불시착을 하게 됐다. 거기에서 어린 왕자를 만났는데 무작정 양을 그려달라는 그의 요청에 조종사는 양을 그린 후, 어렸을 때 그린 뱀 그림을 함께 보여줬다. 어린 왕자는 단번에 코끼리를 먹은 보아뱀이라고 알아봤다. 이로 인해 둘은 진정한 만남을 갖게 되고 진솔한 이야기를 시작하게 된다.
생텍쥐페리는 실제로 비행과 별을 좋아했다. 그가 그의 첫 작품인 [남방 우편기]를 쓰게 된 계기, 아니 어쩌면, [어린 왕자]를 포함하여 모든 작품들을 쓰게 된 계기의 어린 시절 일화가 있다.
별을 사랑하는 소년이었던 그는 꿈에서도 별을 만나게 된다. 별에게 '아름답다'라고 하자, 별이 '나는 네가 아름답다'라고 답한다. 소년은 별에게 '나는 너처럼 빛을 내지도, 크지도, 오래 살지도 못한다며 자신은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슬프게 말한다. 그러나 별은 소년에게 '난 네가 말해주기 전까지 내 아름다움과 크기와 나이를 몰랐으며, 심지어 네가 와서 말을 걸어주기 전까진 말을 할 줄도 몰랐다'며 '넌 내 거울이며 소중한 친구'라고 말한다. 이 전 우주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생텍쥐페리의 만남에 대한 철학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으로 다가온다. 혼자가 아닌 유대관계의 철학. 인간과 인간을 너머 자연까지 아우르는 유대.
성경의 핵심 철학도 만남이다.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만남인 것이다. 우리는 간단하게나마 진정한 만남이 얼마나 어려울 수도 있는지 그 가능성을 칸트의 관념론을 통해 살펴봤고, 생텍쥐페리를 통해 진정한 만남의 의미와 소망에 대하여 알아봤다.
우리의 삶에는 끊임없는 소외와 배척이 이어진다. 온전한 나의 모습을 드러내기는 힘든 사회이다. 나의 상처를 누가 아는 것 자체로 또다시 상처가 된다. 상처는 위로의 대상보다는 결격의 사유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스스로 고독해지고 만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진정한 만남의 소망을 다루는 성경은 대체 무얼 말하고 있을까.
신과 인간의 만남이라는 불가능성을 신은 어떻게 극복하였을까?
신은 결국 우리에게 다가온다. 만남을 갖는다.
그리고 동정하는 위치가 아닌, 고난을 함께 지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는 동등한 입장을 취한다. 이로써 우리는 신과 진정한 만남을 갖게 된다. 성경에서는 끊임없이 나그네, 이방인, 고아, 과부 등 약자에 대한 환대를 요청한다.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환대처럼. 우리가 신을 만나려면 지극히 작은 자들과 만남을 가져야 할 것이다.
여우는 어린 왕자를 만나고 자신을 길들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아무런 의미 없던 저 밀밭도 어린 왕자의 금빛 머리카락을 떠올리게 되어 의미를 갖게 된다면서. 만남은 결국 의미를 만든다. 그것은 꼭 소망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