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나의 학업 실패의 역사(2)
실패 교과서
1부에 이어서.
레벨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내 이력'은 그 동네에서 전설로 남았고 그 꼬리표는 다음 학원에 가서도 이어졌다. 학원 실장이라는 사람은 수학 시험지를 나눠준 뒤 30분이 지나도 한 문제도 풀어내지 못하고 머리만 긁적이는 내 주위를 맴돌며 혀를 차고 있었다. 실장은 망설임 끝에 결국 레벨이 가장 낮은 반으로 넣어주기로 했다. 그마저도 어찌나 힘든 결정이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은 결정이었는지, 열심히 하겠다는 내 대답을 여러 번 요구했다.
치욕스러웠다.
아버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낮에는 일해서 돈을 벌고 밤에는 공부해서 대학까지 나오셨다. 그 당시엔 대학을 나온 사람이 지금처럼 흔치도 않았지만 가난이란 덫 때문에 집에서 지원하나 받지 못하고 주경야독하셔야만 했다. 그래도 후엔 공무원도 지내셨고, 금융권 회사에 임원까지 지내셨다.
형은 어릴 적부터 뭐든지 척척 만들어내고 공부도 스스로 알아서 찾아서 했다. 궁금한 것은 찾아보고, 책에서 봤던 것을 직접 만들어도 보고, 멀쩡했던 라디오도 분해해 보는 성격이었다. 학교 공부 외에는 특별히 학원을 다니지도 않았지만 성적은 항상 상위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와 형은 나의 성적을 이해하지 못했다.
'공부는 앉아서 하기만 하면 되는 건데, 의지가 없어서 그런 거다.' 뭐 이런 식으로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왜 나만 공부를 못했는지.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중학교 2학년 1학기가 처참하게 끝나고 여름방학부터 등록한 학원에서의 나의 성적은 급상승했다. 수준별로 10개의 반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가장 하위반에서 매달 두 단계씩 뛰어올라 겨울방학이 되기 전에 상위권 반으로 올라갔다. 그 중간에는 중학생 과학경시대회가 있었는데 학원 대표... 까지는 아니고 학원에서 수학, 과학 좀 한다는 애들 중에 추려서 참가하기도 했었다. 물론 그 뒤로 따로 소식은 없었다.
아무튼, 나의 성적 상승은 그 학원에서도 굉장히 이례적인 케이스였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학원이 좋아서, 선생님들이 뛰어나서 성적이 올랐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겠지만, 물론 영향을 미쳤던 것은 사실이지만 주요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 시기쯤, 형은 '나관중의 삼국지'를 읽고 있었고, 꼭 읽어야 할 책이라며 적극 추천했다. 그때는 별로 귀담아듣지 않아 한 동안 잊고 있었다. 그러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책꽂이에 꽂혀있는 누런 표지의 10권짜리 삼국지와 눈이 마주쳤다.
"훗, 남자라면 삼국지는 필독서지"라며 호기롭게 책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첫 장부터 한자 섞인 어휘가 많아 읽기가 다소 힘들었고 읽어도 어휘 뜻을 몰라 이해되지 않았다.
결국 10분도 채 되지 않아 꿀잠을 잤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몇 페이지 넘기지 못하고... 계속 꿀잠을 잤다.
책을 펼칠 때마다 읽었던 부분이 새롭고 낯설었고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혹시 난독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만큼 텍스트를 전혀 소화해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학교 교과서 외엔 책 한 권 제대로 읽은 것이 없었다. 갑자기 불현듯 삼국지를 끌어안고 꿀잠 자가다 깨달아버린 것이다.
위기감을 느낀 나는 집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 중에 초등학생 수준으로 한 권 빼들었다. 역시나 모르는 단어들이 너무 많았고 도무지 읽어내질 못했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음을 느꼈다. 한쪽엔 읽을 책을, 다른 한쪽엔 국어사전을 꺼내 들었다. 모르는 단어를 찾아가며, 밑줄을 쳐가며, 몰랐던 국어 어휘들을 외워가며 며칠의 시간을 들여 겨우겨우 책 한 권을 다 읽었다. 중학생이 하기에는 늦은 감이 있었지만, 그때라도 하지 않았다면 아마 계속 내 학업 성적은 바닥을 기었을 것이다.
늦었지만 그렇게 첫 권을 완독하고 다음 책도 같은 방식으로 국어사전을 찾아가며 읽었다. 몇 권 하다 보니 속도가 붙었고 수준이 있는 책을 읽을 때에도 국어사전을 찾지 않아도 될 만큼 읽게 되었다.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책 읽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텍스트를 읽어내는 훈련을 하고 난 후부터 성적이 급상승했다.
우연이었을까.
어린 시절에 봤던 책들이 학교 공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고등학생 때까지 과학 관련 과목들을 매우 좋아했고 성적 또한 매우 우수했다. 정확히는 과학 과목들만 꾸준히 우수했다. 고등학생 때 모의고사를 치면 전국 석차가 매번 1등이었다. 그 과목들의 시험이 끝나면 반 친구들이 시험지를 가져와 모여서 내가 쓴 답안지를 가지고 채점을 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과학 과목의 성적이 좋았던 이유를 찾아보자면,
어린 시절 형의 책상 밑에서 읽었던 백과사전 덕분이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습관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그 장소가 아늑하고 편했고 어머니께서 전집으로 사주셨던 다양한 종류의 백과사전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내용을 글로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텍스트 보다 백과사전의 특성상 사진이나 그림으로 첨부된 자료들이 많았고 사진과 그림 자료가 기억에 훨씬 오래 남았다.
그리고, 백과사전을 보면서 이런저런 상상을 많이 했다.
예를 들어, 빛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물이 내뿜는 파동 때문에 우리 눈에는 색이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 시간이 멈춘다면 파동이 우리 눈에 도달하지 못할 텐데, 그렇다면 사물은 흑백 사진처럼 보이는 걸까? 아니면 아예 보이지 않을까? 만약 보이지 않는다면 보이지 않는 배경의 빛이 흰 빛일까 검은빛일까? 뭐 이런 상상.
또 다른 상상은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가설 중 당시 과학자들로 부터 가장 조롱을 받았던 가설이 운동하는 물체 안에 있는 사람은 물체 밖에 가만히 있는 사람보다 시간이 더 천천히 흐른다 뭐 그런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비행기를 타는 사람과 걸어서 오는 사람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은 비행기를 타고 부산에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걸어서 오는 사람이 도착할 때까지 여유 시간이 생기 것과 같은 원리인가?라는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공상을 많이 했었다.
그렇게 쓸데없는 상상을 하며 나만의 답을 찾으려고 고민했었다.
학창 시절 성적에서 8할은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이어져오는 독서라고 생각한다. 고등학생 때도 공부 안 하고 매일 무협 소설책만 읽던 친구가 수능 모의고사를 치면 언어영역과 외국어영역이 거의 만점이 나와 밤새어 가면서 나름 열심히 하던 나보다 성적이 잘 나와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 친구와 나의 차이는 독서량이었다.
만약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책을 많이 읽고 싶다. 공부를 잘하지 못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금 회사에 취업하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던 이유가 책을 많이 읽지 않아서라는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
나는 공부에 들인 돈과 시간에 비해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내 자녀들에게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어릴 때부터 책 읽는 습관을 길려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요즘 첫째 아이에게 매일 30분씩 한글을 가르쳐주고 있다. 기역, 니은만 두 달째다. 어린 시절 내게 한글을 가르쳐주시던 어머니의 답답해하시던 심정이 혹시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