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오래전 일이다.
프로젝트 실무책임자들 몇몇이 회의 시작 전에 모여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 가운데 나도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가운데 내 옆의 실무책임자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S 업체는 오늘 회의에 왜 안 옵니까?”
그의 질문은 단순 궁금증 차원에서였지만 뉘앙스가 나를 질타하듯이 들렸다. 왜냐면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S 업체를 책임지고 관리하는 주체가 바로 나였기 때문이었다.
“오늘 회의엔 굳이 참석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내가 오지 말라고 했어요.”
끓어오르는 감정을 최대한 속으로 삭이며 조용히 답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 나를 노골적으로 힐난하기 시작했다.
“그럼 안되지. 모든 회의에 협력사들을 무조건 참석시켜야 걔들이 업무 흐름을 잃지 않죠.”
특별히 문제 될 일 없다는 나의 말에도 그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고 오히려 목소리 톤을 더 높여 나를 책망하기 시작했다.
“왜 문제가 안 돼요? S 협력사를 책임관리 한다면 모든 회의에 무조건 참석시켜야죠!”
“회의 아젠다에 나와 있듯이 오늘 회의는 그 업체랑 거의 연관도 없어요!”
“아니, 왜 연관이 없어요. 같은 프로젝트 참여하면서. 그들도 전체적으로 알아야 하잖아요!”
“도대체 몇 번을 말하게 합니까? 내 판단으로는 S 협력사가 굳이 올 필요 없다니까!”
내 목소리가 격해졌다. 나의 판단이 잘못되지 않았기에 주장을 꺾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내 행동의 결과에 쐐기를 박듯이 잘못되면 내가 책임지겠다고도 말하였다. 그러자 그가 “뭘 어떻게 책임질 건데요?”라며 쏘아붙였다.
“프로젝트가 잘못되면 내가 나가면 되잖아요. 사표 쓴다고!”
“아니, 회사가 금전적으로 손해를 입게 되면 어떻게 책임지겠냐는 건데, 사표를….”
그의 말을 끊고 나는 더욱 단호한 어조로 말을 했다.
“그러니까 만약 잘못되면 내가 사표 쓴다니깐! 실무자가 회사에 손해 끼쳤으면 그 정도 결단은 해야지! 그런 책임감도 없이 조직에서 뭔 일을 해요?”
가정된 질문이 마치 기정사실화처럼 던져지면서 격한 언쟁이 오고 갔다. 그렇지만 나의 극단적인 강한 어조 앞에 그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우리의 어린애 같은 언쟁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사표는 더 이상 내가 속한 조직에서 돈벌이를 안 하겠다는 과감한 선언이다. 돈 없이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이러한 결단은 누구에게든 절대 쉽지 않다. 우리 사회에는 샐러리맨이든 자영업자든 공무원이든 정치인이든 간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어떤 잘못 앞에 스스로 책임 지으려는 자가 별로 없다. 분명한 잘못이 밝혀졌음에도 자기 합리화에 급급하거나 입으로 사과조차 안 하려고 버티는 건 고집이라기보단 삶의 나락으로 떨어질 두려움 때문이다. 세상의 돈, 명예, 권력 등은 조금이라도 손해 보기 싫은 인간의 욕망덩어리들이다. 그래서 책임을 진다는 건 이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내려놓겠다는 것으로서 이는 무척 어려운 일에 속한다.
그런데 이 어려운 일을 매번 피할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자들이 있다.
바로 문학을 비롯하여 각종 책을 저술하는 작가들이다.
일반적으로 원고를 작성하는 행위는 책임에 멍에를 더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왜냐면 작가가 쓴 책은 일단 한번 출간되면 다시 없앨 수 없기에 힘든 구속이자 억압을 메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절판이야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중 유통을 중단할 뿐이다. 작가의 요청이 있더라도 이미 국립중앙도서관에 납본된 서적은 함부로 없앨 수 없다. 이러니 ‘법정 납본’제도하에서 책을 출간하는 작가의 어깨는 참으로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법정 납본은 한 국가 내에서 생산된 출판물들을 국가 차원에서 포괄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수집할 수 있는 제도다. 이것의 주된 이유는 동시대의 문화적, 역사적 기록보존을 하기 위함이다. 상업적으로 유통되는 모든 서적은 출간되는 순간부터 사실상 국가문화유산의 성격을 띠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는 곧 작가가 출간한 책은 세세토록 후대에 후대를 거쳐 국가의 책임으로 무기한 관리됨을 의미한다.
책 한 권을 통해 또는 단순 한 구절의 글귀만으로도 누군가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진정한 작가는 두려운 마음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가의 책은 반드시 세간의 평가를 받는다.
일반적으로 독자에게 외면받는 글은 어김없이 한쪽으로 치우친 주장이나 삐뚤어진 사상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역사를 왜곡하기도 하고 사실을 호도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문학이나 학술 분야의 장르를 구분하는 따위는 상관없다. 어느 서적이든 공감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글이 후대로까지 계속 남겨진다는 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다.
사회적 반발이 있는 책이라도 일단 출간된 책은 기록으로 남겨질 수 있다는 점을 작가는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원고와 돈만 있다면 거리낌 없이 아무나 책을 출간하며 작가라는 칭호를 갖게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책임은 회피할 수 있어도 멍에는 그러기 쉽지 않다. 그렇기에 글 쓰는 일에 사명을 갖고 그것을 당연한 부담으로 여기는 진정한 작가정신이 더욱 필요한 시기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작가에게 글 잘 쓰는 필력(筆力) 이전에 삶을 옳게 관조(觀照)하는 분별력(分別力)과 시대를 꿰뚫는 통찰력(洞察力) 또한 필요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