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카만 버찌로 담근 술 익기를 기다리며
어제는 오랜만에 날이 화창했다. 맑은 공기와 그늘 아래 부는 바람까지 여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인들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엔 '오늘의 서울', '거의 유럽 날씨' 등의 짧은 메시지와 함께 하늘이 보이는 이미지가 자주 보였다. 근래는 계절이 수상해서 양력 오뉴월에도 구름 끼거나 장마처럼 연이어 비가 오는 날이 잦아서, 그리고 미세 먼지 때문에 이렇게 선명하고 맑은 느낌의 날씨가 소중하다.
좋은 날씨에 기분 좋게 산책을 나갔건만 안양천 산책을 나선 길은 영 성가셨다. 벚나무가 심긴 아스팔트 산책로를 따라 바닥엔 문대고 짓이겨진, 새카만 버찌 열매가 가득해서다. 가는 걸음걸음 운동화 밑창에 버찌 씨앗이 끼고, 터진 과육의 끈끈함이 느껴진다. 꼭 채 굳지않은 아스팔트 길을 걷는 것 같았다. 계단 모서리에 낀 씨앗을 긁어 떨어내고, 떨어내며 걷다보니 이런 쓸모없는 버찌가 뭐길래-하는 생각이 든다.
성에 안 차는 산책 후 오래된 아파트 단지 안 벤치에 앉았다. 나무가 우거져있는 곳이라 언제나 참새가 가득한 곳이다. 이곳 바닥에도 짓이겨서 씨가 드러난 버찌가 보인다. 참새가 내 옆에 떨어진 버찌를 주워 먹으려다 말고 높은 곳에 달린 버찌를 찾아 날아간다.
도시 참새들은 체형이 다양한데 이 녀석은 몸통이 꽤나 통통한 놈이다. 나무에 앉아 잘 익은 버찌 한알을 집요하게, 한참을 쪼아 먹는다. 시골 참새는 도처에 먹을 게 많아서인지 버찌 먹는 건 본 적이 없다. 인간에게도 버찌란 과육없이 씨만 굵고, 잼 만들기엔 펙틴도 부족해 수고로움 대비 경제성없는 작물이지만 적어도 도시 참새에겐 배부르고 맛 좋은 식사인가보다.
버찌는 벚나무의 열매다. 영어로는 체리가 맞지만 종류가 다르다. 흔히 과일로 먹는 빨갛고 통통한 체리는 서양버찌이고, 일센티 내외 직경으로 다 익으면 거의 까만색이 되는 작은 것이 동양버찌다.
봄날의 벚꽃은 모두에게 환영받지만 버찌는 그렇지 않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의 수만큼 결실 맺을 그 열매는 버찌라는 예쁜 이름에도 흔하게 마주하는 이 열매가 그 '버찌'인지를, 먹을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엄마는 어린 시절에 버찌를 자주 따먹었다고 했다. 시큼하고 살짝 떫은 맛이 나는 버찌는 나름대로 고급스러운 맛이라고 표현하는데, 오래전부터 기억하는 맛은 시간이 지나면서 미화되는 면이 있는 게 분명하다.
사실 며칠 전 시골 부모님 집에 갔을 때 버찌를 땄다. 할머니 산소 앞에 심어진 벚꽃나무에 벚꽃처럼 방울방울 달린 버찌를 따왔지만 바로 냉동실에 넣어뒀다. 어떤 요리를 해 먹을지 몰라서였다. 그저 탐스럽게 달린 모습이 보기에 무척 아름다웠고, 공해없는 시골에서 자란 먹을 수 있는 과일이니 무작정 따 놓고 본 것이다.
버찌는 잘 익은 것일 수록 과육이 연해 바구니에 따서 담는 순간 이미 검붉은 과즙이 터져나온다. 역시 많이는 못 따겠다며 어른 두 주먹쯤 따다 말았다. 같이 간 엄마는 옆에서 몇알을 우무적거리며 씹어먹더니 입이 까매졌다. "할머니가 바쁘게 농사짓는 사람이 할 일도 없이 여기서 뭐 하냐고 성내시겠다"며 깔깔댔다. 버찌따는 일은 이렇게 하릴없는 일이다.
버찌는 잘 찾아봐도 술을 담그는 것 외에 할만한 요리가 없다. 술이 아닌 요리가 있다하더라도 과육을 발라내는 일은 쉽지 않을 테다. 고민 말고 냉동실의 버찌를 더 더운 여름이 오기전에 그냥 술 담그기에 써버리기로 한다. 버찌를 초여름의 기억으로 저장하기.
냉동해 둔 버찌 과육 380그람, 쓴 것도, 너무 단 것도 싫으니까 설탕은 사분의 일인 95그람, 30도 담금주 소주는 부피로 약 두세배면 적당할 것 같아 1킬로그람을 부었다. 며칠 보면서 가라앉은 설탕을 저어주려 한다.
얼렁뚱땅 만들었지만 3개월을 기다려 마시는 그 맛을 상상하자니 통통이 참새가 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