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앙 볼탕스키: 4.4>, 부산시립미술관
#크리스티앙볼탕스키 : 4.4
2021.10.15-2022.3.27
전시 제목인 4.4는 그가 태어난 해인 1944년을 말한다. 동양에서의 죽을 '사'라는 한자 의미가 중첩돼 있다.
지난 7월 14일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는 부산시립미술관에서의 작품배치를 디렉션하고, 즉 전시준비를 마치고 타계했다. 그리하여 작가의 이 전시는 회고전이자 유고전이 되었다.
전시실은 2층 여러군데로 구획되어 있는데, 동선이 있는 여러가지의 방들이다.
'출발'이라는 전구 작품에서 출발한다.
이름 모를 사람들의 사진이 벽돌같은 이미지들의 위에, 실제 벽돌들 위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그 주변을 밝히는 전구들에 의해 인물 사진은 환하게 빛난다.
사진 속 인물의 현재 시점의 생사는 작가에겐 상관없어 보인다. 그의 이 작품은 언젠가 죽었을, 혹은 필히 죽을 어떤 이의 아름다운 '제단'으로 보인다. 살아있었음을 기억하는 기쁨과 슬픔의 뉘앙스가 혼재하는 ‘아름다운' 제단.
성기고 헤진 천에 프린트 된 누군가의 옛 초상이 전구에 의해 빛난다.
볼탕스키의 어린시절부터 노년기까지 얼굴이 변화하는 이미지가 프로젝션되던 실커텐. 이 실커텐이 쳐진 공간은 굉장히 큰 소리로 심장 소리, 그러니까 펄스가 울려 퍼진다. 우리는 볼탕스키의 얼굴을 저 커텐을 통해 스쳐 지나가야 한다.
나는 삼십대 중반이다.
올해 여느해와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최근 지인들의 부고 소식이 잦았다는 점이다. 날이 추우면 워낙 그런 법이기는 하지만 추운 날만을 탓하기에는 몇 죽음들은 이해가 가진 않았다.
지인들은 아끼는 사람들을 천천히 잃어가다가 끝내 잃었고,혹은 황망하게 잃기도 했다. 사람을 잃은 자, 목숨을 잃은 자, 이들 나이의 많고 적음은 상관없어 보였다.
전시장 말미에 볼탕스키의 인터뷰 영상이 재생된다.
볼탕스키처럼 전쟁의 기억을 가진 세대들은 이미 생사에 대한 철학이 확고한 부분이 있다. 예컨대 인생에 작용하는 운이나 우연에 대한 생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전쟁과 학살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겪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소위 ‘세상 다 산 것 같은’ 해탈한 경지의 어떤 면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해탈이 아닌 결국은 덜 승화된 트라우마이므로, 볼탕스키의 경우, 살아있던 사람, 그러니까 이미 죽은 사람은 물론 살아있는 개별 사람들을 집요하게 오래도록 기억하는 일을 평생 반복적으로 수행한다. 이 수행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죽음이다.
한편, 우리 세대를 생각해 본다. 우리 세대는 전쟁은 아니지마는 나름대로의 다양한 환경과 투쟁하며 생을 살아내고 있다. 전쟁과 학살을 목도한 볼탕스키와 그의 철학에 직접적으로 공감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그와 나 사이에 흐르는 감성은 조금 다르다.
우리가 처한 시대와 환경이 볼탕스키가 겪은 상황보다 낫기 때문에 다른 감성을 갖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여전히 전쟁과 학살은 나에게서 거리상 멀어졌을 뿐 도처에서 일어난다. 미디어를 통해 퍼다 날라진다는 점은 다르다. 이것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에게 도달하지 않는 전쟁 소식이 더 많을 것이다. 이외에도 극단적인 자본의 양극화, 그러나 동시에 보이지 않는 형식의 자본주의, 여전히 법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폭력과 선고, 당면 과제가 되어버린 ‘인간’과 ‘휴머니즘’에의 재정의. 이렇듯 무엇에 반대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 것인지를 잘 알 수 없게 된 복잡한 현실은 스스로 더 똑똑하고 냉철해져야 한다는 강박과 함께 울며 포기하고 싶은 심정을 갖게 한다.
시스템에 비유될 수 있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멀리서 보면 평온하고 자기 피드백 루프를 가진 것 같지만, 가까이서 보기엔 싫고 겁나는 장면이 많을 것이다. 마치 구글어스뷰가 무차별하게 포착한 살인 장면처럼. 시스템은 초상권 보호를 위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얼굴 모두를 얌전하게 블러 처리 해 두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 속에서 급작스레 뇌암 판정을 받고 입원했던 친구의 사촌동생은 시한부로 의식을 잃어갔다. 코로나로 인한 병원 운영 시스템 때문에 가족 면회도 잘 안 됐다. 의식이 거의 사라지고 나서야, 그러니까 죽기 하루 전날에야 그녀가 그렇게 보고 싶다던 친구들의 면회가 처음 허락 됐다고 한다. 그녀의 평안을 빈다.
... 제멋대로 나오는 마음의 소리,
그래도 제 생각에 아마도 우리는 답을 찾으려 해요,
도처에 많은 기억들이 너무나 많기만 해요,
답이 없는 것만 같고,
답이 없단 걸 알기도 하지만,
모르는 척 지향점을 찾으려 노력하고,
해낼 것과 해낸 것에 집중하려 해요,
그러다 때로 방향을 비롯한 모든 감각을 상실하기도 하지만요,
....
볼탕스키가 던진 '출발'과 '도착'이라는 죽음에의 은유, 죽음에의 지독한 집착과 생을 기억하려는 의지는 우리 모두를 생이라는 죽음 사이의 낀 시간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전시를 다 보고 나니 근래 언제 이렇게 죽음에 대해 과하게 몰입한 적 있던가 싶다. 어쩌면 죽음에의 몰입을 일부러 피했던 순간들도 꽤 있었는지 모르겠다. 죽음은 도처에 있고, 지금도 서서히 그리고 갑자기 오고 있는 중인데도.
전구 작품 '출발'에서 시작해 '도착'으로 끝나는 전시 구획 공간이 보여주듯, 전시 관람여정, 그리고 생의 시작과 끝을 떠올려 보면 이 두 항은 너무나 가까운 거리다. 전시를 다 보고 내려가려는 계단 참에서 '출발'과 '도착'이 한 눈에 조망되던 그 순간 더욱 그렇게 느껴졌었다.
그들 각자의 시간을 다, 하기.
이것이 각자의 방법을 떠나 볼탕스키와 내가 동의하는 생을 대하는 태도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