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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 Jan 14. 2024

오늘도 진행 중

우리는 한 팀

 내면세계를 지니고만 있는 것과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엄청나게 달라!... 스스로 예감하거나 부분적일망정 자각해야만 그 가능성이 비로소 자기 것이 될 거네 <데미안 中> 


 듬성듬성 고민만 했던 것들을 올해는 잘 정리하고 싶었다. 그 첫 단계로 주변을 정리하고 익숙했던 공간을 낯선 공간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물건들은 버리고 쓸만한 것은 당* 마트에 팔기로 했다. 그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남편이 방구석에 쌓아 놓은 물건들이었다. 

운동을 하다가 족저 근막염과 허리 통증이 생겨 이제는 더 이상 골프를 치지 않는 남편에게 골프공은 반갑지 않은 선물이다. 그는 자신이 골프를 치지 않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고 주장한다. 


골프 치러 다니면 주말에 사람들 만나고 늦게 올 텐데, 그럼 아이랑 함께 있을 시간이 부족하잖아. 그래서 골프 이제 치면 안 될 것 같아~”

 다정한 아빠의 모습이 연상되겠지만 오산이다.


주말이면 그는 거실에 있는 안락의자에 붙어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 텔레비전 리모컨을 옆에 끼고 있다. 주말에는 집돌이로 변신해 왕왕대는 TV 소리를 내는 것이 싫어 나는 가끔 혼자 바깥으로 나갔다. 몇 시간을 보내고 집에 왔는데 들리는 소리는 여전하다.

볼륨 좀 줄여!”

여러 번 말했더니 쿠*으로 물건을 주문했다며 진짜 음질 좋은 헤드셋을 샀다며 블루투스를 연결해 내 귀에 꽂아준다.

“어때? 소리 좋지? 이제 거실에서 이 걸로 보려고~”

어이가 없다가도 한편으로는 불쌍했다. 하지만 성적 때문에 한껏 예민한 아이를 옆에서 도와주기는커녕 강 건너 불 보듯 거실에서 여유자작 즐기는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집중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J는 이제 고1이다. 가끔 숙제 때문에 빨리 저녁을 먹고 들어가려는 아이에게 그는

"쫌만 있다가 들어가면 안 돼? 우리 아들이랑 더 얘기하고 싶은데.." 

옆에 있어 주길 바란다. 자신의 헛헛함을 채우고 싶은 것이다. 저녁식사 시간이면 그는 저녁 대신 와인에 안주를 먹으며 얘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가끔 저녁에 줌에서 하는 모임이 있어 저녁을 차려주고 먼저 방에 들어간다. 저녁을 빨리 마무리하고 싶은 생각이 크지만, 남편의 노곤함을 풀 유일한 시간이라 편히 쉬도록 양해를 구하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간다. 


그가 아이와 논다는 것은 집에서 꼼짝 않고 한 공간에서 쉬는 것이다. 이해한다. 그는 보통 평일 새벽 6시에 출근한다. 가까운 거리에 사무실이 있지만, 일찍 오는 상사 때문에 그의 출근 시간은 상사 시간에 맞춰 있다. 회사에 얽매여 있는 그를 볼 때면 어쩔 때는 처량하기도 하다. 중년 남자의 고독함이 느껴지지만 아이도 나도 그것을 채워주지 못한다.

  


낯선 시간으로 진입하는 준비 과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니 아이 학업이 걱정이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그것을 발현하는 것은 개인의 노력에 달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발현이라는 것이 각자의 두뇌와 투자 시간에 따라 다르다. 누구는 적은 시간으로 결과를 얻기도 하고, 누구는 많은 시간을 공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좋지 않다. 


학원에서 재시험을 보고 온 아이가 푸념을 늘어놓았다.

“나 이번에는 진짜 노력 많이 했는데... 공부 머리가 없나 봐. 수업 전에 잠깐 공부한 얘가 나보다 더 잘 나왔어. 이제는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힘이 안 나.”

이제 본격적으로 공부 시작인데 이렇게 말하는 아이를 보니 가슴이 철렁했다.

매번 재시험을 보고 오는 아이가 안쓰러워 단어장을 만들어 쉽게 외울 수 있도록 연상 그림을 그려 함께 외웠다. 하지만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이의 불안은 점점 높아졌다. 시험을 볼 때면 긴장해서 머리가 하얘졌고, 재시험을 볼수록 점수가 더 낮게 나왔다.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학원에 아이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커트라인을 낮춰 달라는 양해를 구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재시험을 보는 횟수가 늘수록 아이의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학원을 그만두었다.


내가 하던 일을 줄였고 아이와 함께 도서관에 다녔다. 옆에서 응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가끔 실수를 연달아하는 아이를 보고 답답한 마음에 육두문자 첫 어절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러함에도 능청스럽게 슬슬 웃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할 수 있는 끈기와 융통성 있는 학습 습관이다. 아이가 가진 잠재력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성실함으로  언젠가 밖으로 드러나길 바라며 나의 낯선 하루는 오늘도 진행 중이다.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흔들리며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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