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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on Dec 01. 2023

방황하는 투자자

-      투자처를 바꿔야 하나?

 아이 학업 스트레스를 고려해서 수요일과 일요일은 일정을 잡지 않았다. 시간이 부족해서 숙제를 못했다거나 쉴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애초에 막으려는 나름의 방패막이기도 했다.

어제는 아이에게 오롯이 쉴 수 있는 수요일이자 마음껏 풀어질 수 있는 기회였다. 프리랜서로 일을 하는 나는 가끔 줌으로 회의를 하거나 평일에 외출을 한다. 


 외부에서 모임이 있어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20분 후 도착예정인 버스는 점점 대기 시간이 늘어났고,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정류장에서 40분가량 꼿꼿이 선채로 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가끔 흩날리는 눈발은 전혀 아름답지 않은 귀찮은 녀석으로 여겨졌고, 배는 요란하게 알림을 울렸다. 운동을 약속한 SNS 모임 방에 저녁식사 메뉴 인증 샷이 올라왔고, 유달리 맛나 보였던 뚝배기 떡볶이를 보니 미리 사놓았던 밀키트 생각이 절실했다. 손이 시려 주머니 깊숙이 주먹을 쥔 채 한껏 어깨를 오므리고 제자리 뛰기를 했다. 3000보가량 찍혀있던 손목시계는 덕분에 5000보가 넘었다. 운동 인증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긍정적 노력을 할 때쯤 진동이 느껴졌다.

남편 : 어디야? 

나    : 아직 밖이야. 오랜만에 운동할 겸 차 두고 왔는데, 버스 대기 시간이 계속 늘어나네.

남편 : 그래? 오늘 차 가져갔으면 세탁소에서 옷 좀 찾아 달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몇 시쯤 도착할 것 같아?

나    : 한 시간 반쯤 걸릴 것 같아.

남편 : 그래. 조심히 와.

남편은 그렇게 용건만 말하고 끊었다.


집에 도착하니 어두컴컴하다. 시각은 저녁 8시. 아이는 방에서 두 발 뻗고 고이 누워 있었다. 불을 켰더니 짜증이 한 다발이다..

J :  엄마랑 아빠가 번갈아서 전화하는 바람에 잠 하나도 못 잤어. 나 지금 누웠단 말이야. 불 꺼죠!


나 한번, 남편 한번! 고작 두 번 전화를 받은 일이 잠을 못 자게 하는 불청객이었다는 변명 섞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 : 지금까지 공부하고 자는 거야? 

J: 나 수학 좀 했어

핸드폰을 만져보니 뜨끈뜨끈 하다. 책상 위는 아침에 있던 그대로다. 분명 핸드폰과 논 것이 뻔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줄이자’


 양배추를 꺼내 씻었다. 겉껍질을 두 장 벗기고 살짝 상처 난 양배추 두 세장을 더 버렸다. 단단하게 뭉쳐있는 속 덩어리는 내 안에 쌓인 감정만큼 두껍고 단단했다. 밀키트에 양배추를 사정없이 찢어 넣었다.  


늦은 저녁 줌미팅이 있었다. 회의를 하는 동안 옆방에서 둔탁한 기타 소리가 들렸다. J 사생활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그냥 두었다. 밤 11시, 기타를 만지작 거리는 J의 속이 궁금하다. 지금까지 저러면 내일 힘들 텐데..

마침 학원에서 문자가 왔다.


A학원: 어머니 J 숙제를 아직 받지 못했습니다. 확인 부탁드려요.

B학원: 과제점수: _ , 시험점수:_   이번주 일요일에 재시험 있습니다. 


의자에서 꿈쩍 않고 일어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여러 말풍선이 떠올랐지만 지금 아이한테 말풍선을 터트린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차라리 가만있는 것이 날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로 속이 시끄러울 때쯤 j에게 한없이 너그러운 남편 목소리가 들렸다.

“ J야, 이제 공부하는 게 어때? 너 좀 많이 쉰 것 같은데 ”   

둔탁한 기타 소리는 여전히 들렸다.

하루가 지났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들어온 아이가 고등입학 원서를 가져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J : 엄마! 나 고등학교 그냥 00 갈까 봐. 우리 반에 공부에 관심도 없는 얘들이 많이 썼더라고. 괜히 쫄지 말고   나도 한번 써볼까?


나 : 거기 가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할 수 있겠어? 수학은 이미 몇 번 돌았을 거고, 선행 안 한 친구     들은 내신 잘 따기 어려울 거야

J  : 00 얘들도 사람이잖아. 열심히 하면 나라고 못하겠어? 그냥 써볼래. 학교 분위기가 중요한 것 같아. 

     중학교 다니면서 조금 더 공부하는 분위기였으면 좋았겠다는 생각 했었거든.

     오늘 원서 확인하는 날인데 괜찮은지 엄마가 선생님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면 안 돼?

적극적으로 입학원서 변경을 원하는 아이를 보자니 지금 당장 전화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담임: 하하, 우리 반 아이들이 이번에 00을 많이 지원했더라고요. 두줄 그으시고 도장 찍어 보내주세요. 괜찮습니다. 

고등학교를 친구 따라가는 것은 아니지만 내심 나도 00을 보내고 싶었다. 못 이기는 척 두 줄을 긋고 저녁 준비를 했다. 학원에 가기까지 2시간이 남았다.

J : 엄마 바빠? 나 식탁에서 하고 싶은데, 엄마가 나 단어 좀 체크해 주면 안 돼?

나: 그래! 엄마랑 같이 하자~



     1시간 뒤 저녁을 준비하려고 일어났다. 뒤를 돌아봤더니, 이내 아이 눈꺼풀이 반쯤 내려와 있다. 조금 전 패기 있게 얘기했던 아이는 없고 뭔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J; 나 오늘 학원 안 갈래. 차라리 그 시간에 수학 문제 풀면 안 돼? 단어 암기 안되니까 아무것도 하기 싫어.

   어차피 공부를 하던 안 하던 점수는 똑같은데 뭐 하러 공부해? 팽팽 노는 얘랑 성적이 비슷하단 말이야! 


나: 영어는 단어가 기본인데 포기하면 안 되지. 사람마다 특징이 다르잖아. 넌 암기가 안 되는 대신 섬세해서    듣기는 잘하잖아. 그건 노력해도 어려운데 넌 이미 듣기는 공부 안 해도 어느 정도 나오니까 얼마나 좋아!  힘들어도 조금만 더 해보자. 어떤 책에서 그러더라. 떡이랑 빵처럼 쉽게 넘길 수 있는 음식도 있지만,    고기랑 오징어처럼 꼭꼭 씹어야만 하는 음식도 있다고. 네가 부족한 게 아니야.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지. 엄마생각에는 공부 패턴을 바꿔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너만 포기하지 않으면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어.


. . .


조용하다. 이미 아이의 머리는 식탁과 가깝다. 저녁을 먹이려고 깨우려다 그냥 담요를 덮어줬다.


J : 아니, 재우면 어떡해! 나 안자. 잠깐 피곤해서 눈 감고 있었던 거라고. 자면 또 까먹는다고, 그럼 또 재시험 봐야 하잖아! 영어도 해야 하고, 수학도 해야 하고, 과학, 역사, 한자, 국어도 부족한데 언제 다해! 


참다못해 터트리고 말았다.


나: 야! 너 그래서 수요일 쉬라고 스케줄 짰잖아. 어제 그렇게 팽팽 놀고 낮잠 자더니 그게 말이라고 하는 거야? 너 양심 있으면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않니? 


J: 나 어제 수학 조금은 했거든?

이 녀석을 확!

아직 적절 공부량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 아이와 입씨름을 하려니 기운이 빠졌다. ‘그래, 말을 줄이자.’


퇴근해서 온 남편을 보자 아이의 투정 섞인 목소리는 한층 높아졌다. 듣다 못한 남편이 말했다.

 “그러게 평일에 누가 그렇게 낮잠을 몇 시간씩 자냐! 어제 미리 좀 했었어야지. 딴말하지 말고, 가서 열심히 하고 와”

처음이었다. 아이에게 이렇게 말한 것은. 그동안 아이 교육에 관심 없던 남편이 보기에도 한심스러웠나 보다. 

라이딩을 하러 가는 나를 보고 남편이 무심하게 말했다.

“조심이 갔다 와~”

은하수님 블로그 

밤거리를 예정 시간보다 5분 일찍 도착했다. 집에 가면 늘어질 것 같아 근처 도서관에 가서 노트북을 폈다. 남편이 전화했다.

남편 : 도서관이야? 같이 오려고? 

나    : 응, 어차피 나도 할 일 있어서.

남편 : 에고.. 우리 마누라 힘들어서 어떡해. 괜찮겠어?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사 먹어. 

나    : 웬일이야? 오빠가 이런 말을 다하고..

남편 : 아까 보니까 너 많이 참는 게 보이더라고.. 그래서 내가 한마디 한 거야


 울컥했다. 

나 혼자 도착 지점 없이 혼자 걷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힘들다고 얘기해도 아이만 다독이는 모습에 불만이었는데,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 그동안 서운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문득 연애시절이 생각났다. 내가 이 남자를 좋아한 이유였다.

내가 다리 아프면 길거리 의자에서도 눈치 보지 않고 다리를 주물러주던 그 선배.

가난하지만 딛고 일어설 준비가 된 남자

아빠처럼 따뜻했던 남자

아이한테 투자할 것이 아니라 멀지 않은 은퇴를 남겨둔 남편에게 투자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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